19. 소금이신 예수님

by blogstar posted Jan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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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주님은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소금 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통념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금의 여러 가지 역할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맛을 내는 것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 다음 두 번째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다른 것 속에 들어가서 변치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소금이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 ‘너희는 영생이라는 물건을 찾지만 그 영생이 바로 나다’ 그런 표현이기도 하고 ‘너희는 영생이라는 물건을 찾지만 이 성경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말씀한다.’ 예수님의 설명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보존성과 맛과 변하지 아니하는 이 세 가지 특성을 예수님이 다 가지고 계신다. 정말 그분은 소금이시다.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문제를 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대답을 했지만 한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왕이시여 바로 소금입니다, 그렇게 말을 했을 때 그가 제일 큰 상을 받았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첫째 맛이다, 맛을 내는 이 소금이 모든 음식에 들어가서 그 음식을 정말 맛있게 만드는 일종의 조미료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조미료인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로 살맛이 있게 하시는, 영원히 살맛이 있게 하시는 자이다.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사는 것도, 그리고 영원히 사는 생명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님 때문인 것이다.

얼마를 강조해도 과하지 않은 그분의 자기희생의 사랑, 자기를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희생한 사랑 이 사랑이 진정한 맛이다. 또한 그분은 변하지 아니하신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연구할 때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분은 불변이시다. 변하지 않으신다. 이 변하지 않는 것을 레위기 2장의 ‘소제’ 가운데 소금을 쳐서 그것이 변하지 아니하는 소금언약이 되었다고 말한다. 언약 자체가 절대로 변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소금으로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변한다. 로마서 3장 3절에 하나님이 고발당하신 고발의 내용이 거짓되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진실하지 않으시다, 변하신다, 말과 행동이 다르시다고 고발한다. 그래서 히브리말에 변하지 아니하는 것, 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을 ‘신실함’이라는 히브리어로 ‘에무나’라는 단어는 변하지 아니하는 상태, 그것이 증명이 되었을 때 ‘에메트’라는 단어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 말씀하신 ‘진리’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변의, 변치 아니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변치 아니하심이 증명이 되어, 확실히 증명이 되어서 드러난 사실을 ‘진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어떤 과학적 진리, 어떤 역사적 진리가 아니다. 그분의 사랑의 변치 아니하심의 영원한 진리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셔도 틀리지 않는다. 세 번째는 첨가되는 물질을 변치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존을 잘하게 하기 위해서 첨가물 속에 뚫고 들어가서 그것을 절여야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그렇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삭개오 속에 젖어 들어가셨다. 그리고 삭개오의 영혼을 사로잡으셨다. 그리고 부패케 하는 것들을 밖으로 내쫓으셨다. 그리고 삭개오를 영원히 있게 하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예수아’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이다. ‘예수아’ 오늘 이집에, 삭개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여진, 젖어 들어간 모습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창녀 막달라 마리아 속에 젖어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의 삶이 되셨다. 그의 생명이 되셨고 그의 인생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으신 것이 그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 2절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그저 날라리 선생이다, 어떻게 저 더러운 인간들과 함께 섞이시는가?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장례식 소식만 들으면 어느 집이든지 관계없이 무조건 가서 장례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다 치루고, 하관예배를 드리고 묘를 다 꾸미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을 위로하는 예배까지 드리신다. 나는 그분을 참으로 존경한다. 그분은 소금이다. 그들의 슬픔과 그들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시는 목사님이시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목사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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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전도회는 장례식 전도회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맞다. 장례가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동시에 그 집에 가서, 그 장례식장에서 아예 주무시고 모든 일을 다 처리해 주신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유족들을 위로하고 끝까지 그들을 보살펴드리고 함께 울고 위로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개인과 섞이고 죄인의 아픔을 함께 하고 죄인의 기쁨을 함께 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되겠는가!

어렸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지금 육칠십 대 되신 분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동네에서 누가 돌아가시면 동네의 모든 사람이 다 모인다. 그 집의 상이 아니라 그 동네 전체의 상이 되었다. 그 없던 시절에 어떤 분은 쌀을 가져오고 어떤 분은 김치를 가져오고 어떤 분들은 나무를 가져오고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며 울어주고 같이 음식을 만들고 같이 자고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이다.

이제는 옆 집 아파트에 사람이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몇 달이 되어 냄새가 나면 겨우 강제로 문을 따서 보면 이미 죽어서 썩어 있는 시신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 슬픈 현실이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 좀 나쁘게 말하면 이기주의가 정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랑의 교통을 다 끊어 놓았다. 그래서 이젠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갈 장소가 없고 다 자기를 방어하는 일에, 자기를 지키는 일에 너무 익숙해진 사람들. 아파트 문을 걸어 잠그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르는 너무나 슬픈 현상을 우리가 오늘 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삶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과 섞이셨던 그 사랑, 그렇게 섞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랑,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본능적 사랑이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말씀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위 감정이입이라고 하는 소위 내 감정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부모는 자식이 말을 하지 않고 밥을 먹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그면 문을 두드리고 자식의 마음속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 자식보다 더 애통해 하면서 자식의 마음을 열고자 한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신다. 계시록 3장 20절“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두드리는 이유는 내가 들어가서 너와 같이 먹기를 원한다, 너와 동고동락 하기를 원한다, 너와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같이 살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동고동락 하는 삶이 될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동고동락 하는 삶이 될 때에만 그 사랑으로 우리는 세상을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동정’이라는 단어, 사랑이라는 이야기 속에 동정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곧 동정이 없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동정’은 같은 감정을 말한다. 같은 마음을 말한다.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상대방이 느끼는 그 슬픔과 아픔을 내가 동일하게 느낄 때만이 사랑이다. 그런 감정 없이 그런 같은 동정의 마음이 없이 물건이나 돈을 갖다 주는 것은 사실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이 아름다운 사랑이, 이 소금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영원히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13절
  • 요한복음 5장 39절
  • 레위기 2장
  • 로마서 3장 3절
  • 요한복음 14장 6절
  • 누가복음 15장 1,2절
  • 고린도전서 13장 1-3절
  • 요한계시록 3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