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화평케 하는 자

by blogstar posted Jan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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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자기를 희생하신 사랑이 평화를 가져왔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 장인데 이 사랑 장을 화평의 장이라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 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 그것은 주님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죽으심은 평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 왕이라는 단어가 전쟁용어로는 장군이다. 군대 장관이다. 실제로 싸워서 평화를 성취하신 것이다. 가장 큰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막상 우리의 죄를 뒤집어 쓰셨을 때에 그것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아버지를 향해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가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것은 엄청난 무게의 짐이었다.

그가 부서지고 계셨다. 하나님 자신과의 영원한 분리, 그것은 그가 당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극심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굴복하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셨다.주님의 평화는 그분의 자기희생의 결과로 오는 것이다. 영원히 자기를 희생하신 사랑이 평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스스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어느 사회에서 혹은 가정에서 스스로 평화를 이루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타고난 본래의 육신의 본성으로는 절대로 평화를 만들 수가 없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 된다.

계속 반복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 안에 새롭게 창조되지 않는 이상 그 일은 불가능하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생기지 않으면, 그 마음을 품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으로는, 우리의 본성으로는 결단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혹시 이룬다면 그것은 다 위선이며 거짓이다. 잠간 감추고 있는 것뿐이다. 가끔 속에 있는 분노가 올라온다. 그 분노는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의 분노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때 반드시 분노한다. 사단이 분노하는 것처럼 분노한다. 그래서 평화를 깨뜨린다. 이러한 죄 된 본성을 숨기고 포장하는 위선자로 살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철저히 죽어야 한다.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어서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마음으로 거듭나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평강의 왕께서 그 평화를 창조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평화의 정신은 하늘과 연결 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만든다.

평화와 사랑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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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장 7절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났다는 증거는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평화와 사랑의 정신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로마서 8장 9절의 말씀대로이다.

로마서 8장 14절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게 되면 결코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을 동정하거나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미가서 5장 7절에는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는 여호와에게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다시 말하면 사람 중심의 신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보고 화평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고 화평을 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죄가 사라졌을 때 오는 결과이다. 죄는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은 언제든지 분쟁을 일으킨다. 혹시 우리가 상처를 입어서 그것을 감추고 체념하고 포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근본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기가 입은 상처를 보복 하고자 하는 악한 자기 사랑의 본성이 올라와서 그것을 기어코 보복한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복수하고자하는 죄 된 육신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반드시 언젠가 복수를 한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한다. 그것을 포기할 때는 자기 동정이라는 사랑으로 사랑의 형태가, 자기 이기심의 형태가 바뀌는 것뿐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참았다고 이렇게, 이렇게 포기했다고 그리고 자기를 동정한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자기는 어떻게 되든지 그것은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거기에만 관심이 있다. 자기 몸이 부서져도 짓밟혀도 그것은 관심이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빌라도의 법정에 그리고 헤롯의 법정에, 안나스의 법정에 끊임없이 끌려 다니고 어려움을 당하실 때에도 그분은 오직 관심이 하나님과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있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어머니를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기억하고 계셨고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셨던 자기 고난의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이었다. 극도의 육체적 고난의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오직 하나님과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그를 못 박았던 백부장을 회개시켰다. “이는 진실로 의인이었도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그가 비록 이방인 로마의 군인이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진실로 화평케 하는 자이시다.

화평케 하시는 예수님

여러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사회에서도 너무나 많은 경우에 비정함과 사랑 없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가운데 오고간다. 정말로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냐고 죄인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 중에 많이 없어졌다.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목사님이 타락해서 간음을 했다. 그런데 그 신자들이 목사님에게 보낸 편지는 “목사님,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목사님이십니다. 돌아와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하면 받아 주겠다는 표현이다.

진정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어떻게 설교단에서 서서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돌아오면 다시는 목사로서 우리가 단에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출교입니다. 회개 하시오,”라고 하는 것 보다 더 감동적이다.“목사님,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목사님이십니다. 그 깨끗했던 아름다운 목사님으로 다시 돌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눈시울이 뜨거움을 경험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그 목사님은 나쁜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비난했지만 그 신자들은 아니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목사님이십니다.” 그가 돌아와서 어떻게 단에 올라와서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다시는 목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믿음을 가졌던 형제들이, 자매들이 그 사람을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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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 그들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동정하는 자들이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품에 끌어안을 수 있는 자들이다. 비난하는 것은 사단의 일이다. 사단과 동업하지 않기를 바란다.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고 끌어안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다. 예수님과 동업하시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분명히 이야기 하면 요한일서 4장 7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났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증거는 사랑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죄를 버렸다는 말은, 분명히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죄인도 품에 안고 사랑할 수 있는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으로 화목케 하는 자로 보내셨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마음과 품성을 드러내는 자로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란다.

성경구절

  • 고린도전서 13장 4절
  • 빌립보서 2장 5절
  • 요한일서 4장 7절
  • 로마서 8장 9절
  • 로마서 8장 14절
  • 미가서 5장 7절
  • 요한일서 4장 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