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 자들

by blogstar posted Jan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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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하나님께 대한 생각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시편 50편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 자기가 생각으로 만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주 엄격하시고 범죄 한 자들을 그야말로 엄하게, 아주 무섭게 다루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을 머리에 생각하고 있고 그런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만큼 비판적이고 용납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른다.

흔히 그것을 철학자들이 ‘신관’이라고 써서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생각, 신관. 이 신관이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 어떤 생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관이 바뀐다. 세계관이 바뀐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보고 산다. 그래서 그들의 가정에서 자녀들을 다룰 때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인생관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관에 의해서 꼴 지워져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비록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2절에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바짝 마르고 볼품없는 그런 외모를 가지셨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이 아주 키가 크고 준수하고 잘생기고 품위가 있는 모습으로 오셨다면키가 작고 못생긴 사람은, 볼품없는 인간들은 아마도 위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정말로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주님께서 그렇게 생기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못생긴 사람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들과 같이 되셨음을 보이셨다. 우리의 예수님에게는 이사야 53장 2절의 말씀대로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없었던 분이시다. 또한 그분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 사람은 귀신이 들렸다고 했고 예수님을 요한복음 8장 48절에 사마리아 사람, 잡족이라고 했다. 술 먹는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그들과 이야기하셨다. 창녀들과 더불어서 이야기하셨다. 그러니 잡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고 귀신이 들렸다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들 속에 있는 마음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자신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보이려고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참으로 사람 사이에 거하실 때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사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더구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더욱 그러했다. 주님을 누가 이해했는가?

그의 죽으심을 이해했던 사람은 창녀 마라아이다.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세상의 명예를, 부귀영화를 기대했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죄인, 가장 더러운 창녀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했다. 그는 한없이 울었고 주님의 못 박힐 발에 자신의 머리를 내려 그의 모은 돈으로 샀던 향유를 주님의 돌아가실 발에, 몸에 부었다. 주님께서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를 청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피

여러분, 진정 마음이 청결한 것이 무엇인지 고린도후서 11장 1,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너희들이 용납해 줘라, 내가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비유를 하나 들겠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남편 되신 예수님에게 중매를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자들, 그들의 양심이 깨끗해진 자들, 그들의 본성이 깨끗해진 자들을 주님의 처녀로 내가 너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분에게 중매하겠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 깨끗해져야 되는가? 양심이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랑할 줄 모르는 지극히 비판적이고 정죄를 좋아하는 독사의 마음들이 정결케 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겸손의 피다. 그 겸손의 피는 교만의 죄악을 씻는다. 그리스도의 피는 자기희생의 사랑의 피이다. 그것은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우리의 이기심을 씻어내는 피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사랑의 피이다. 그것은 미움을 씻어내는 피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양보와 희생의 피이다. 자신을 위해서 먼저 점령하고 누리고자 하는 이기심을 씻어내는 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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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는 평화의 피이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이기심으로 독이 오른 사람들의 싸움을 정결케 하시는 피이셨다. 여러분, 예수님의 피가 무엇인지를 아셔야 된다. 우리를 정결케 하신 피가 무엇을 정결케 하셨는지를, 그 피가 무슨 피인지를 아셔야 된다. 그분의 피는 말없는 피였다. 말없는 사랑의 피였다. 우리 부모님의 피가 그러하듯이 사랑은 말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탓하지 않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것이다. 말없는 용서의 피였다. 그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하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정결함을 입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을 뵙지 못할 것이다. 산과 바위야 무너져서 내 위에 덮여서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에서 나를 덮어달라고 울부짖게 된다. 양은 절대로 화를 내는 짐승이 아니다. 어린양의 진노란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던 사랑을 거절당하고 배신당한 사랑의 아픔의 진노이다. 자식에게 배신당한, 용서를, 사랑을 거절당한 부모가 부들부들 떨면서 우는 눈물의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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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 히브리서 10장 27절에 말한 재림이 그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들이 더러움을 선택하고 주님의 용서하시는, 깨끗게 해주시는 용서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결코 거절하지 않게 되시기를 바란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해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고독하게 다니셨을 때 그는 그 고독 속에서도 정녕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용서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독의 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도 그를 버리셨고 우리도 그를 버려서 땅에도 계시지 못하고 하늘에도 계시지 못하고 하늘과 땅에 버림을 받아 그는 공중에 걸레처럼 매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실제로 페르시아 인들이 사람을 못을 박아서 공중에 매달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땅은 신이 거하는 거룩한 곳인데 그 더러운 것을 어떻게 이 거룩한 땅에 놓을 수 있냐고 그래서 못을 박거나 혹은 목을 줄에 걸어서 공중에 매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고독하게 가셨던 예수님,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 받으셨던 분. 영원한 심판과 저주를 홀로 지셨던 그분, 그분의 유일한 소원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분이셨다. 우리를 다시 보시기 위해서, 우리를 다시 끌어안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그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일 때만 우리의 본성도 우리의 마음도 정결케 되는 것이다. 그의 용서만이, 그의 사랑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축복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뵈올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누가복음 15장 17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는”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말했다. 돌아갈 때 그가 ‘내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탕자가 돌아간 곳은 돈이 많고 먹을 것이 많은 ‘아버지 집이’ 아니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뵈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우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뵙게 되기를 바란다.

성경구절

  • 시편 50편 21절
  • 이사야 53장 2절
  • 요한복음 8장 48절
  • 고린도후서 11장 1,2절
  • 히브리서 10장 27절
  • 누가복음 15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