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라” 말씀 하신다. 여기 온유한 자라는 말씀이 나타나는데 이 ‘온유’라는 말을 영어는 ‘친절’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온유’라는 말의 의미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부드럽다, 친절하다, 자상하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이 온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꽤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영어로 번역한 헬라어는 ‘친절’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다.
온유하다, 겸손하다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이 친절이라는 말은 조금 더 사랑의 본질적인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고 본다. 영어는 친절, ‘kind’라는 말을 썼다. 누가 누구에게 친절한가?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친절하다. 로마서 2장 4절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이끌어” 여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표현도 영어로 kind라고 번역되어 있다. 친절하다, 하나님의 친절하심.
어찌 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벌벌 떠는 것이다. 자식의 밑에 내려온다, 겸손해진다. 자식에게 부드럽게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식을 다치지 않게, 어떻게 하면 자식을 행복하게 해줄까? 그래서 할아버지가 손자 발밑에 무릎을 꿇고 손자와 이야기를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거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그 쉼이라는 쉼의 단어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말과 조금 다르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 너희라는 존재를 말하고 있는데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 마음은 조금 다르다. ‘푸쉬케’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히브리어로 ‘네페쉬’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육체적 존재 자체를 말하고 있다. ‘숨 쉬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힘든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이제 숨을 좀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어떤 인간의 내적 자아인 그 앞에 나타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 마음과 뒤에 마음은 말이 다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마음과 몸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로 이 단어를 사용하시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건강한 마음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고 말하고 반대로 건강한 육체 속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고 말한다. 마음과 몸은 서로에게 상관관계가 있다. 당연하다,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그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우리의 육체를 쉬게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같이 말씀하셨고 그것이 죄의 용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멍에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나중에 보여 주셨는데 그 멍에는 십자가의 멍에인 것이다. 그런데 그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말은 주님이 그것을 다 지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곁에 따라가는 입장이다. 무거운 것은 주님이 다 지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지신 이 십자가의 멍에는 우리는 사실상 지는 게 아니다. 주님이 지시는 것이다. 그런데 옆에 그냥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해서 죽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내 죽음 속에서 네 죄를 내게 맡기고 너는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에사실상 우리의 죄가 죽는 것이지 우리 존재는 죽지 않는다.
우리들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바울이 말했듯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할 때에 실제로 못 박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그분의 사랑 속에서, 그분의 용서 속에서, 그분의 죽으심 속에서 죽는 것뿐이다. 그 사랑이, 그 용서가 내 죄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멍에를 메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죄를 맡기지 아니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
여러분,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악의 멍에를 지셨는가? 그것은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2장 6, 7절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빌립보서 2장 5절로 9절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는 그의 희생의 죽으심 속에서 나타났다. 자기를 비우시고 하나님 되신 모든 권세를 다 비워버리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로 돌아가심으로 온유가, 겸손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식 평안 혹은 온유함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희생의 사랑의 제물로 바치신 그 결과로 오는 온유와 겸손이었다. 사랑이 없다면 결코 우리는 온유할 수 없다, 겸손할 수 없다, 친절할 수 없다.
주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용서의 십자가였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의 십자가였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의 십자가였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안식의 십자가였다. 그것을 나와 함께 메자고 말씀하신다.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멍에 같이 메자, 짐은 내가 다 지겠다. 네 죄 짐은 내가 다 지겠다.
예수님의 용서와 희생에 참예함
내 용서와 희생에 참예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심히 교만하다. 우리 종자가 마귀 종자이기 때문에 마귀의 교만의 씨가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존심이라는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자존심, 때로는 사람들이 자기를 정신적으로 너무 학대하기 때문에 자존감을 가지라는 말을 하지만 그 말과는 우리가 달리 사용한다. 소위 자기를 높이는, 영어로는 ‘pride’ 이런 교만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자기를 낮추는데 있다. 자기를 비우는데 있다. 진정한 겸손은 온유와 평안은 바로 자기를 내려놨을 때 온다.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분명히 자기를 사랑하는 죄의 정신이다. 자기를 내려놓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사람은 어떤 모욕을 당할지라도, 어떤 짓밟힘을 당할지라도 움직이지 않는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같은 멍에를 메자고 하실 때 우리에게 메자고 하시는 멍에는 분명히 모욕과 수치와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이다.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인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수천만 평, 수억 만평의 땅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누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인가? 살아남은 사람이다, 죽지 않는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다, 영생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죽으면 그 땅은 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히 살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낮추는 사람, 겸손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 그 사람들만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5절
- 로마서 2장 4절
- 마태복음 11장 28,29절
- 빌립보서 2장 6,7절
- 빌립보서 2장 8절
- 빌립보서 2장 5-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