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1

by blog posted Jan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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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로마서 8장을 연구하겠다.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 바울이 로마서 8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어쩌면 이 로마서 전체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8장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다. 

참 흥미로운 사실은 로마서 8장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중에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3장부터 7장 사이에 법적인 칭의 문제, 이 법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어떻게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법적 용어를 사용하므로 의롭게 된다, 의롭도록 만들어 주신다. 즉 칭의 라는 단어를 사용하다가 드디어 이 8장에 와서는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말씀이 나타난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보면 성령은 항상 종말적 사건으로 나타난다. 맨 끝에 오는 사건이다. 대표적인 예로 에스겔의 새 언약을 살펴보면 에스겔 36장 24~27절 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 품으로 모아들이시고 회개케 하시고 그리고 우리 죄를 씻으신 다음에는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을 부으셔서 우리가 동의한다면, 우리가 맡기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새 영을 운전하셔서 율법이 지켜지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이 성령의 부어주심,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언약사건의 종말적 사건이다. 언약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오는 사건이다. 끝에 오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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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하게 말하면 이 언약이 호세아 6장 7절에 아담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언약, 그 아버지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지으셔서 그 아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다 주셨다. 그리고 제 칠일에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자기를 주신다. 소위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스가랴 12장 1절에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라고 말씀하신대로 사람 속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영의 자리를 만드셨다. 그 영의 자리에 영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구별하여 주셨다. ‘구별 한다’는 ‘성’에 ‘영’이라는 말을 붙여서 ‘성령’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영의 자리를 만드셨다. 그 영의 자리에 영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구별하여 주셨다. ‘구별 한다’는 ‘성’에 ‘영’이라는 말을 붙여서 ‘성령’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성령이 우리의 영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가 되시는 이것을 ‘언약’이라고 불렀다.

이 성령이 사람의 영 속에 곧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자기 사랑을, 자기 혼을 자식에게 다 쏟아 붓는, 어머니가 딸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자기 마음을 다 쏟아 붓는 그 상태를 우리가 흔히 이 성령이 부어진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은 항상 창조에 있어서 마지막 종말적 사건이다. 

이 로마서 8장에 정죄함이 없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우리를 자기 것으로 인정하시는 표로서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과에서 우리가 끝까지 다루지 못했지만 이 바울이 그토록 애통하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에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셨던 그 애통의 끝에 나타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한다. 하나님의 사법적인 칭의,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다 법적으로 완벽하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를 용서하시고 법적으로 의롭다 하신 그 이상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오늘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신 경험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법적인 문제는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생명의 영

로마서 8장 2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 성령이 부어주심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생명의 성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영!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서 8장 9절에 이 영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기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이 ‘영’이라는 상태는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를 영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그 영이라는 상태의 법, 그 법칙이 앞에 나타난 생명이라고 하는 단어에 의해서 수식이 되고 있다. 

이 생명의 성령의 영, 하나님과 하나 된 이 상태가 죄가 해결된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그 상태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품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그 사랑이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이 생명이다, 영생이다. 그렇게 성경은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하나 됨이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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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무엇이라고 풀 것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생명이신 하나님,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시다. 자기를 다 주시는 사랑이시다. 그 사랑과 하나 된 상태를 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 놀랍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본래는 ‘성령’이라고 되어있지 않다. 헬라어는 ‘영’이라고 되어 있다. ‘영의 법’이다. 성령이라고 번역해도 아무 상관은 없다.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이미 해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를 영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그 영이라는 상태의 법, 그 법칙이 앞에 나타난 생명이라고 하는 단어에 의해서 수식이 되고 있다. 생명이신 하나님,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시다. 자기를 다 주시는 사랑이시다. 그 사랑과 하나 된 상태를 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 안에 내 자신을 계속 내어 맡겼을 때 그분 속에 있는,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그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이미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똑같은 말씀이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1장, 2장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쟁으로, 혹은 법적인 입장에서 계속해서 논증을 하다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면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단순한 이야기로 ‘성령이 너희들에게 임한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그것이 너희가 율법을 너희 스스로 지켜서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느냐?’ 질문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다음에는 용서와 더불어 우리 안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있다. 죄를 밀어낸 그 빈 공간에 성령을 채우시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 3절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생명의 법에 참여하려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내어 맡기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들어가는 유일한 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육신

그러면서 바울은 이 법적인 용어를 다시 한 번 드러낸다. 로마서 8장 3, 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분명히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가 육신 때문에, 죄의 본성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아들을 통해서 이루셨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천명하고 있다. 

3절 맨 마지막에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로 되어있는데 ‘죄를 정하사’라는 말의 본래 헬라어 뜻은 ‘정죄한다’는 말이다. 육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악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육신, 곧 우리의 타고난 죄된 본성, 우리 조상에게 물려받은 자연적 유전적 본성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그의 삶을 통해서, 그의 이루신 의를 통해서, 그 완전한 절대적인 이타심의 본성과 그 삶의 결과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이기심 덩어리인지, 완전한 이타심의 사랑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과 비교할 때에 우리 육신 속에는 절대적 이기심의 본성만이 있다는 사실을 판단시켜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신앙도 내가 구원 얻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가 우리 죄악의 본성의 모습을 얼마나 잘 드러내고 있는지! 나는 멸망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영원한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자기의 영원한 생명,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생명을 값없이 즐겁게,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버렸던 모세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영,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려주옵소서 라고 말한 그 거룩한 본성은 모세 자신의 본성이 아니고 베드로전서 1장 10, 11절에 말한 선지자들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그의 삶을 통해서, 이타심의 본성과 그 삶의 결과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이기심 덩어리인지, 완전한 이타심의 사랑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과 비교할 때에 우리 육신 속에는 절대적 이기심의 본성만이 있다는 사실을 판단시켜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육신에 죄를 ‘정죄하셨다. 심판하셨다’라는 말은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5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영을 좇아,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8장 4절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율법의 요구’라는 말은 본래 ‘의’이다. ‘율법의 의’, ‘디카이오마’, 다시 말하면 율법을 다 지킨 ‘디카이오마’이다. 율법을 다 지켜진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율법이 밖으로 이루어진 그 결과이다. 이것은 절대로 본래 타고난 육신의 본성을 내가 고쳐서, 그것이 성화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의의 본성+성령에게 내어맡김

많은 사람들이 ‘성화’라는 개념을 내 육신의 본성, 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변화될 수 있다. 죄의 생각도 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죄의 본성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성화된다고 하는 것은 의의 본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이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자라나는 상태를 성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성화된다고 하는 것은 의의 본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이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자라나는 상태를 성화라고 말한다.

곧 거듭난 이후의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이 자라나는 상태이다. 내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의의 본성, 새 영과 새 마음을, 내 자신을 성령에게 그 의의 본성이 자라도록 내어 맡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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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본성 + 성령에게 내어 맡김 = 성화, 소위 성화된 본성은 그 자체가 내 본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내게 주어진 선물인 그리스도의 마음이 점점 자라나는 상태를 우리가 성화라고 한다. 동시에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은 점점 선명하게 더 완전하게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악한 것인지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함께 대조되어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내게 주어진 선물인 그리스도의 마음이 점점 자라나는 상태를 우리가 성화라고 한다.

바울이 로마서 7장 18절에 결론적으로 말한 그대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하는 그 형편에까지 이르게 된다. 육신의 본성이 변화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어제 죽었으면 그만이 아니라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날마다 죽는다고 표현했다. 

갈라디아 2장 20절에 바울이 말한 그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그것이 날마다 계속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죽는 경험이다. 이 성화는 항상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피로 씻어 정결케 된 사람으로, 하나님 것으로 구별할 때마다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성경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반복되고 깊어지는 경험이다. 

성화는 항상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피로 씻어 정결케 된 사람으로, 하나님 것으로 구별할 때마다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성경에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내 지체 속에’라는 ‘지체 속’과 ‘그리스도 안’을 비교한다. 여러분은 어디에 살겠는가? 여러분의 죄 된 육신의 본성 속에 살겠는가, 아니면 여러분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려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는가?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겠다는 그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길 바란다. 

키워드 : 로마서8장, 그리스도안에, 성령, 칭의, 언약, 생명의성령의법, 성화

성경구절

  • 로마서 8장
  • 에스겔 36장 24~27절
  • 호세아 6장 7절
  • 스가랴 12장 1절
  • 갈라디아서 1,2장
  • 갈라디아서 3장 1~3절
  • 출애굽기 32장 32절
  • 베드로전서 1장 10,11절
  • 로마서 7장 18절
  • 고린도전서 15장 31절
  • 갈라디아서 2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