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죄를 이김

by blog posted Jan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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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주신 이유

이제 죄를 이김 이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6장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 로마서 6장은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그 의의 삶을 유지해 가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바울이 아주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흔히 어떤 이들이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을 줄여서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지는 연합의 구원론이라고 하는 타이틀을 달기도 한다.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는 소위 믿음이라는 말을 예수님과의 연합이라는 말로 바울이 고쳐서 불렀다. 인격적인 연합, 그런 용어를 써서 바울이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그럴듯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에 자기를 던져서 그분과 하나 되는 경험이다. 어떤 지적인 경험이 아니라 인격적인 경험이다. 다시 말하지만 전적으로 전인적인, 전적인 의뢰,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존재 자체를 맡기는 그런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에 자기를 던져서 그분과 하나 되는 경험이다. 전적으로 전인적인, 전적인 의뢰,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존재 자체를 맡기는 그런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로마서 6장 1,2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지금 사도바울이 갑자기 이런 표현을 하게 된 이유는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런 말씀을 바울이 먼저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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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율법이 가입했다’는 말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로마서 2장 14, 15절에 마음에 기록한 하나님의 율법,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거의 망가져서 사람들이 죄에 대한 의식이 없었을 때, 죄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돌판 십계명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셨다. 

그렇게 한 이유는 우리의 망가진 양심, 마음에 기록한 율법으로는 죄를 깊이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아주 분명하게 깨닫게 한 것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 이 계명은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그렇게 단순하다. 거기에 어떤 핑계도 어떤 합리화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하다. 거짓말 하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어떤 핑계도 있을 수 없다. 

이런 명백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무너질 수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 앞에서 정말 죄인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율법의 본질인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을 사람들이 느낄 때는 말 그대로 절망이다. 

우리가 산상보훈을 읽다 보면 그것은 도대체 되지 않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주님께서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듣기에는 얼마나 좋은 이야기인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내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절대로 거절하지 말라. 여러분, 이 이야기대로 한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사랑의 본능, 본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특별히 율법의 구현이신, 율법을 그대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분의 삶과 그분의 죽으심 앞에서, 그분의 양심과 그분의 본성 앞에서 우리는 정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죄를 더 깊이 깨달은 사람들, 어떤 말이나 행동이 아닌 율법의 본질을 더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 정말 자기들은 속절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컸다는 것을 깨닫는다.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율법을 그대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분의 삶과 그분의 죽으심 앞에서, 그렇게 죄를 더 깊이 깨달은 사람들, 어떤 말이나 행동이 아닌 율법의 본질을 더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 정말 자기들은 속절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5장 20절,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얼마나 놀라운 희망의 복음의 말씀인가! 은혜가 더욱 넘친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한 말, 곧 율법을 지키므로 사람이 구원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비아냥거리며, 그러면 우린 실컷 죄를 더 짓고, 죄 많이 지은 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터이니 우리 마음대로 살자, 그런 이상한 잘못된 비꼬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침례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6장 1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러면서 세례(침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6장 3절,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침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세례(침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의식 중의 하나이다. 

곧 세례(침례)라는 사건은 우리말 번역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합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본래 헬라 말은 ‘속으로 들어가’ 그렇게 되어 있다. ‘합하여’라는 말이 아니고 ‘속으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헬라어로 ‘에이스’라는 전치사를 썼다. 소위 헬라말로 ‘밥티조 에이스’ ‘속으로 들어가 세례(침례)를 받는다.’ 나라는 죄 덩어리가 예수 그리스도 속에 들어간 결과가 무엇인가? 그의 죽으심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혼자 돌아가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가슴에 묻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2천 년 전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 2천 년 전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신 그 역사적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령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셔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동의나 우리의 요청 없이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가슴에 묻고 돌아가시므로 우리의 죄를 이미 다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오늘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과 합한 내가 다시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그 구원, 그 용서 속으로 오늘 들어가는 것이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미 나를 용서하시고 묻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서 세례(침례)를 받는 것이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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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상징했다. 물이 갈라지듯이 예수님 속으로 내가 들어가서 예수님의 은혜의 용서 속에 내 죄가 죽어서 장사되고, 물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죄 없는 생명으로 새 사람으로 부활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새 생명, 로마서 5장에 말씀하셨지만 이 ‘생명’이라는 말 아주 중요한 말이다.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계신 것처럼 그 새 생명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예수님과 하나 되는 연합이라 말하면서 그것을 구체화된 예식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침례)식이라고 말씀하셨다. 2천 년 전 우리의 죄가, 죄의 본질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서 그분의 죽으심과 함께 사라지고 해결됐다는 사실을 성령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 때 거기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그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예수님과 하나 되는 연합이라 말하면서 그것을 구체화된 예식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침례)식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앞에 로마서 3장과 4장에 말씀하셨던 ‘믿음’이라는 단어가 6장에 오면 ‘합하여’ 즉 연합이라는 단어로 바뀌고 있는 것뿐이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없어진 우리의 과거 죄의 본성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모순을 만나게 되는데 바울이 골로새서 3장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로새서 3장 5절에 가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 사법적인 죽음,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으심 속에서 우리의 죄의 죽음, 죄의 모든 결과, 죄의 모든 본질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법적으로는 우리에게 값을 요구할 것이 없다. 주님께서 이미 다 갚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우리를 법적으로 주관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속의 죽으심 속에서 우리의 죄의 죽음, 죄의 모든 결과, 죄의 모든 본질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법적으로는 우리에게 값을 요구할 것이 없다. 주님께서 이미 다 갚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의 은혜에 맡겼기 때문에 이미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7장에서 나타나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여전히 육신의 본성, 죄의 본성이 남아 있게 하셨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을 때에 우리의 죄의 본성까지 다 없애주셨다면 우리가 얼마나 편하게 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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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의 본성이 없어졌을 때에 또 다른 얼마나 큰 위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셨고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죄의 값은 다 없애셨으나 그 죄의 본성은 남겨 두셨다. 그 죄의 본성과의 싸움을 통해서 다시 우리 죄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알게 하시고 죄의 본질의 색깔이 뭔지를 깨닫게 하시고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이었는지를, 또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어디까지 용서해 놓으셨는지를 깨닫는 은혜의 과정으로 남겨두셨다. 

끊임없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옛날에 에덴동산에서처럼 끊임없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고 살았던 그 믿음을 우리 안에 연습시키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죄의 본성을 남겨두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됐고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 육신을 죄에게 다시 드리지 말라.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라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동시에 바울이 로마서 6장 10, 11절에 우리에게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길지어다’는 말이 그 유명한 로마서 4장 4, 5절에 나오는 의롭다고 여기신다는, 의로 여기신다는 그 똑같은 말이다. 헬라어로 ‘로기조마이’이다. 

믿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여기시겠다고, 너를 그렇게 그쪽에 두지 않고 이제는 의의 쪽에 두신다고 말씀하신다. 너는 완전한 사람이고 완전한 생애를 산 것처럼 내가 그렇게 계산해 주겠다. 이제 너희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너희도 너희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 볼 때 이미 너희 죄가 거기서 다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더 이상 갚을 것이 없는 죄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었고, 하나님께는 살아있는 존재로 너희 자신을 그렇게 간주하라, 계산하라고 명령 하셨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계산하지 않는다. 왜인가? 자기가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죄에게 자신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용서 받은, 의롭게 된 일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단호하게 죄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주님의 용서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고 그렇게 여러분이 주장하게 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갚을 것이 없는 죄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었고, 하나님께는 살아있는 존재로 너희 자신을 그렇게 간주하라, 계산하라고 명령 하셨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계산하지 않는다. 자기가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죄에게 자신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라는 말 가운데 참 흥미로운 말은, 이 믿음이라는 의미에서 ‘던진다’ ‘맡긴다’ 여러 표현을 쓰는 중에 그 중에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주장한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주장한다’라고 믿음에 대하여 그렇게 표현한다. ‘내 것으로 만든다’를 영어로는 ‘appropriate’ 이 말이 심지어는 잘못된 말로 쓸 때에는 ‘횡령한다’는 말로도 사용된다. 공금을 유용한다. 국가 돈인데 자기가 내 것으로 마음대로 가지고 쓴다. 이렇게 나쁜 의미로까지 쓰인다. 그런데 완전히 내 것이 아닌데도 자기 것처럼 받아들이고 믿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내놓았기 때문에 얻었다면 그것은 거래이지 은혜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저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자랑하고 광고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의의 선물을 만방 앞에 선전 할 필요가 있고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감사하게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는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죄가 인격화 되어 있다. 마치 사람처럼 죄라는 존재가 우리를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왕 노릇한다는 말은 소위 지배한다는 표현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다 갚으셨기 때문이다. 죄가 우리를 상관할 수 있는 아무 건수가 없는 것이다. 죄가 우리한테 와서 주장을 할 수 있는 아무 근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절대로 죄와 상관하지 말고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에게 우리 몸을 맡기고 그분을 섬기고 살 것이라는 것이다. 

키워드 : 죄, 로마서6장, 그리스도와함께, 세례, 침례, 산상보훈, 율법, 은혜, 믿음, 골로세서

성경구절

  • 로마서 6장 1~3절
  • 로마서 5장 20절
  • 로마서 2장 14,15절
  • 로마서 3~4장
  • 골로새서 3장 3,5절
  • 로마서 7장
  • 로마서 6장 10~12절
  • 로마서 4장 4,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