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속죄의 마지막 결과

by blogmaster posted Jan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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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완전히 갚았다

이제 성소의 죄가 옮겨지는 과정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속죄를 위해서 어떻게 죄가 옮겨지는가?

분명히 번제단, 즉 십자가에서 속죄의 근거는 완성이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함축해서 ‘속죄가 완성되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곧 번제단에서 죄의 댓가가 끝나지 않았으면 이 나머지 속죄 과정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다. 분명히 십자가에서 더 이상 죄를 갚을 것이 없이 완전히 갚았다. 죄를 지고 들어 온 양이 죽임을 당하면서 남긴 영수증이 피가 되어서 성소 안으로 옮겨지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뿌려서 보여지는 것이다. 이 이유는 레위기 4장 20절“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되고 그 결과는 용서, 사함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레위기 4장 20절에 나타난 이 ‘사함’이라는 단어는 ‘용서’라는 단어로 히브리말의 아주 독특한 단어인 ‘살라흐’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실 때만 쓰는 단어이다. 인간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때는 쓰지 않는다. 전문적으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 할 때 쓰는 동사이고 또 그렇게 쓰였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피로, 죽은 양의 피로 그를 덮으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여기 ‘그를 위하여’라는 히브리어 전치사는 ‘알’이라는 전치사인데 이것은 ‘위에서’ ‘위에’라는 뜻이다. 영어로 ‘on’이다. ‘upon him’이다. 직역하면 ‘그 위에서 속죄하여’, 즉 용서가 된 것을 보면 그가 죄를 덮으신 것이 분명하다. ‘cover’ 덮으셨다. 용서, 즉 사함을 얻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 사건이다. 이 용서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속죄하다’라는 단어가 결과적으로 끝에 가면 히브리어로 ‘카파르’가 ‘지운다’는 뜻이다. 그러면 덮은 것은 지워진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덮은 것은 즉 용서한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용서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죄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야 하는 것이다. 죄를 전혀 짓지 않았던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다시 태어나서 다시 인생을 산다면 과거의 우리의 죄 된 생애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왕 우리가 지은 죄는 엎질러 진 물이다. 용서 되었지만, 상처는 나았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 있는 것이다. 아예 애초에 상처가 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우리 인생은 어차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워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카파르’라는 동사의 마지막 의미이다. 다시 이 피가 지성소 안으로 옮겨져서 법궤 앞에 일곱 번 뿌려지고 하나님의 속죄소 위에 한 번 뿌려질 때에, 곧 피가 다시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 뿌려질 때에 레위기 16장 30절“그를 위하여 속죄하여” 즉 ‘카파르’ 이때는 정결케 된다는 것이다. 그가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되리라. 깨끗하게 지워진다는 이야기이다. 지워짐! 

용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의 용서된 흔적 자체가 지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속죄의, ‘가파르’의 마지막 결과이다.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지막 속죄제, 즉 유대인 달력으로 7월 10일, 유대인 명절로 ‘대 속죄일’이라고 부르는 이 날에 똑같은 속죄제가 드려지는데 그 속죄제가 마지막 가져오는 결과는 ‘정결’이다. ‘속죄하다’ ‘지운다’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정결’이다. 이것이 속죄제의 마지막 모습이다.

하나님의 보좌로 옮겨진 죄, 다시 보면 양이 죄를 지고 간다. 즉, ‘나사’, 죄를 담당해서 옮긴다. 그리고 양이 죽는다. 이제는 피가, 용서된 죄를 성소 안으로 옮긴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보인다. 그래서 소위 용서, 사법적 용서가 일어난다. 실제로 우리 개인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다. 사법적으로 개인적인 죄가 용서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인을 위한 죄가, 온 인류의 모든 죄인을 위한 속죄가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개인에게 적용되는 일은 성소 안에 피가 옮겨졌을 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우리 각자의 죄를 우리가 우리의 죄를 믿음으로 맡겼을 때에 우리의 죄를 개인적으로 용서하시고 마지막 하나님의 속죄소 안에서는 영원히 지워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지만 성경이 성소에서 일어나는 우리 죄를 어떻게 처리하시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우리 모든 사람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믿는데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영생의 조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번제단에서 일어난 속죄의 완성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 모든 죄인의 죄 값이 다 갚아진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전반부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것으로 성경은 끝나지 않는다. 분명히 후반부가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후반부는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분명히 영생의 조건이 있다. 누구에게 조건이 있는 것인가? 죄인에게 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조건이 없다. 즉 하나님은 조건 없이 용서하셨다, 용서하시고 그 용서를 받으라고 죄인에게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서를 받으려면 죄인에게는 반드시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믿든 자마다” 곧 ‘맡기는 자마다’이다. ‘자신의 죄를 맡기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영생의 조건이 이루어 졌는지, 곧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죄를 맡겼는지 안 맡겼는지)는 반드시 조사를 해야 한다. 죄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를 심판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아무 조건 없이, 기준 없이 마음에 들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아니면 버리는 그런 분이 아니다. 혹은 어떤 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원 전에 우리를 예정하셨기 때문에 예정한 대로 예정된 사람은 구원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후반부는 기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반부만 필요한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다! 끝났다!”라고 하면 되는 것이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에베소 2장 8절의 구원의 공식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자신의 죄 된 인생을 맡기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의 가슴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탕자처럼 돌아가지 아니하면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 자신을 던졌던 것처럼, 맡겼던 것처럼 맡기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하는 것이다.

속죄의 과정 또한 똑같다. 결코 다르지 않다. 반드시 죄가 양에게 옮겨지고 다시 용서된 죄가, 피로 말미암아 제사장에 의해서 성소 안으로 옮겨진다. 제물인 양이나 제사장이나 똑같은 예수님이다. 제사장이 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고기를 먹어서 백성의 용서된 죄를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레위기 10장 17절에 제사장이 양고기를 먹은 것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담당하여 갚아진 죄를 들고 가서 “하나님 죄 값을 다 갚았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피를 보이므로 개인의 죄가 해결되는 속죄가 필요했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단계인 이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앞에서 피가 뿌려지므로 하나님께서 회개에 의해서 용서된 죄를 확인하신 다음에 그 모든 것을 도말하시고 정결케 지우시는 일을, 마지막 속죄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죄를 전혀 짓지 않았던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면 계시록 21장에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겪었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머릿속에서 우리의 죄 기록들을 다 지우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 마지막 구원 얻은 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동일한 말씀을 남겼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 것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죄가 다 없어졌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이사야서 65장 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아멘!

놀라운 은혜이다. 무엇 때문인가?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다 씻었기 때문이다. 무한한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큰 태산 같은 우리의 죄도 그 무한한 예수님의 피 값에 다 지워지고 영원히 기억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복음은 용서만이 아니라 다시는 기억나지 않는, 영원히 도말하는 놀라운 은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은혜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기를 바란다.

태그:은혜,복음,도말,속죄,성소,죄,번제단,십자가,용서,지성소,속죄소,정결,대 속죄일,속죄제,십자가

성경구절

  • 레위기 4장 20절
  • 레위기 16장 30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에베소서 2장 8절
  • 레위기 10장 17절
  • 요한계시록 21장
  • 이사야서 65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