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복음과 율법, 믿음과 율법

by blog posted Jan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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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사도바울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왜 ‘언약’이라는 말이 성경에 나타났는가? ‘언약’(히브리어로 ‘브릿트’)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단어이다. ‘언약’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하나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죄인이 그 은혜에, 용서의 가슴에 자기를 완전히 맡겼을 때 하나 되는 상태를 언약이라고 한다. 이 언약이라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받으셔서 당신의 것으로 만드시는 사건이다. 

‘언약’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하나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죄인이 그 은혜에, 용서의 가슴에 자기를 완전히 맡겼을 때 하나 되는 상태를 언약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언약이라는 사건이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항상 쓰시는 이름이 ‘여호와’라는 이름이다. 출애굽기 6장 3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내가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너희들을 이제 구원해서, 정식으로 나와 결혼해서, 너희와 함께 언약을 맺는 입장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고 말씀하셨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영원한 자’라는 뜻이다. ‘영원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영원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이 그 이름 ‘영원하신 자’라는 이름을 두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절,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내 사랑은 영원하다’,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 내 사랑과 내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 이 언약은 사실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맺은 언약이고 그것이 실체화된 것은 옛날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셔서 정식으로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서, 백성으로서 언약을 체결하시는 일로 구체화되었다. 

어쨌든 로마서 4장 13절의 말씀처럼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율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한 표현이다. 곧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다음에 출애굽 할 때에 돌판 언약을 주신다. 그 율법은 실제로는 언약의 비석이라고 되어 있다.(출34:28)

그런데 문제는 그 언약의 비석을 자기들이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하는, 언약을 스스로 지켜보려고 하는 노력 때문에 사실 그들은 멸망당한 것이다. 언약이 유지되는 것 또한 역시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그 은혜를 받아들인 믿음으로 언약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율법

계속해서 바울이 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구약의 핵심 주제라는 논리를 로마서 4장 17절에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다. 곧 돌판 율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할례를 받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셨다고 창세기에 말씀한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자기를 전적으로 내어 맡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의를 주셨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율법의 본질인 사랑, 절대적 사랑, 이타심 혹은 본능적인 사랑이 되어지는 것을 율법을 지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본능이라는 기계가 없다. 사랑을 찍어낼 수 있는 기계가 우리 속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셨지만, 이미 그것은 다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서 다 파괴되고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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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복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율법이 없이는 복음을 바르게 소개할 수 없다. 율법은 구체화된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펼쳐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뿌리가 되고 복음은 향기 나는 꽃과 그 꽃이 맺는 열매이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복음과 율법, 믿음과 율법 이런 단어들은 절대로 분리할 수가 없다. 복음의 내용이, 율법을 다 이루신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율법을 빼버리면 무엇을 우리가 받는다는 말인가? 의의 내용이 무엇인가? 의라는 것은 모든 율법이 다 지켜진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원칙은 모든 이방인의 종교의 기초에 놓여 있다. 이 원칙이 이제 유대 종교의 원칙이 되었다. 사단이 이 원칙을 심어 놓았다. 이런 원칙이 신봉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죄를 막을 방벽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아주 중요한 원칙을 이제까지 설명하였다. 율법의 행위들이라는 말은 인간이 율법을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모든 시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율법의 본질, 곧  본능적인, 절대적인 이타심의 사랑, 이 이타심의 사랑이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들이다. 그런데 이 본능적인 이타심의 사랑이 우리의 본성 속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 이기심의 본능만 가지고 있다. 

이 이기심의 본능에 의해서 우리는 신앙도 한다. 내가 결단코 구원 얻어야 되겠다는 이 본성 자체에 본능적 사랑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그 본능적인 절대적인 이타심의 사랑을 평생의 삶과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때 그것을 거절하고 끝내는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께 무언가를, 무슨 의로운 행위를 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고 구원을 얻어내려고 하는 소위 하나님의 은혜 없는 신앙, 그리고 모든 율법의 시도, 스스로 율법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들은 다 이방종교의 기초에 놓여있는 것이다. 사단은 그 일을 부추겨 왔다. 불가능한 일을 계속 시도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주어진 동기도 사랑이고 내용도 사랑이다. 결과도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없앤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없앤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본성

사단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사랑 밖에 할 줄 모르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랑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 그 본질적인 사랑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사랑을 우리가 오해하도록 하여 십자가를 가리고 율법의 본질을 가려서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 군림하는 독재자로 보이도록 사단은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일해오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사단의 계획대로 된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심판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그가 하신 말씀과 행동이 다르다는 고발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끝내는 하나님을 종이호랑이로 만들고 사단은 이 우주를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왜 사단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의 표현인 율법을 공격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지금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이들이 사랑이라는 미명아래서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아주 못 살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율법을 폐지하고 밀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일이 있다.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생의 시작이 된다. 여기 주목하길 바란다.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의 품성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의 본질과 똑같다. 나 아닌 다른 존재만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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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주님께서는 그렇게 사셨다. 그것이 그분의 본성이었고 그 본성이 밖으로 이루어진, 밖으로 구현되어서 그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 열매가 그것이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품성인 것이다. 

본성이라는 단어는 어떤 본질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점점 구체화되어서 밖으로 드러나고 열매 맺혀진 것을 우리가 흔히 품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절대적 사랑의 본성이 없이는 사랑의 율법의 품성을 절대로 이룰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그 본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겉으로 잘 지킬지라도 다 위선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의의 본질은 절대로 이룰 수가 없다. 그 본성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 사랑의 본성이 없이는 사랑의 율법의 품성을 절대로 이룰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그 본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겉으로 잘 지킬지라도 다 위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악하니”(마12:34)라고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에 쌓은 악이 악한 것을 낸다’(마12:35)고 말씀하셨다. 이 죄악으로 기울어진 본성은 자기가 연약하기 때문에 자기를 스스로 덮기 위해서 스스로 의로워지는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들어내려고, 소위 위선과 거짓으로 자기를 점철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구약시대에 제시된 의의 위대한 표준은 신약시대에서 낮춰지지 않는다.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

다시 정리한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은 주님께서 이루신, 그의 삶을 통해서 이루신 의에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또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본성을 우리 속에 심어 넣어주시는 것이다. 사랑의 본성을 집어넣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넣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냥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쓰는 혼이라는 말과 같다. 정확한 비유가 아니지만 그 혼을 불어넣으셔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지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우리 안에서 그분이 의를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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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적으로 그분께 자신을 맡겼을 때, 믿었을 때, 믿음으로 맡겼을 때 그 일을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또 우리 밖에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인 것이다. 여러분이 정말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성경대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바란다. 

키워드 : 복음, 율법, 믿음, 아브라함, 언약, 로마서, 본성, 사랑, 품성, 의

성경구절

  • 출애굽기 6장 3절
  • 예레미야 31장 3절
  • 로마서 4장 13절
  • 출애굽기 34장 28절
  • 로마서 4장 17절
  • 마태복음 12장 34절
  • 마태복음 12장 3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