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

by blog posted Jan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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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맡김

이제 ‘믿음’이란 단어로 가보자. 이 ‘믿음’이란 단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리 머리로 인정하는 그것이 아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 말씀을 주목하길 바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분명히 성경은 말하기를 마귀도 믿고 떤다고 말하고 있다. 

마귀의 믿음은 무엇인가? 마귀의 믿음은 결코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지 않는, 자신의 죄를 맡기지 않는, 오직 머리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만 인정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인정이지 믿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의 믿음은 결코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지 않는, 자신의 죄를 맡기지 않는, 오직 머리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만 인정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인정이지 믿음이 아니다.

요한복음 2장 23, 24절, 성경에 믿는다는 말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구약에 ‘아만’이라는 동사는 본래 뜻이 ‘든든하게 해 준다’ ‘맡아서 기른다’ ‘양육 한다’ 그런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믿는다’는 말로 번역될 때, 사역형이라고 해서 ‘맡긴다’ ‘견고하게 해 주시도록 의탁한다’ 그런 뜻이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의 본래 히브리어의 뜻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속에 맡기도록 했다’ 그런 표현이다. 그래서 이 ‘믿음’이란 단어를 읽을 때는 ‘맡김’이라고 읽으면 틀리지 않는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믿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사실에 자기를, 자기의 지성을 갖다가 기대고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적 개념이다. 그래서 이 머리로 믿는 믿음 그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의 본래 히브리어의 뜻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속에 맡기도록 했다’ 그런 표현이다. 그래서 이 ‘믿음’이란 단어를 읽을 때는 ‘맡김’이라고 읽으면 틀리지 않는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그분을 내 신앙으로 맞아들이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했다. ‘믿음’은 ‘맡긴다’, ‘자기를 던진다’는 표현이다.

마태복음에 나병에 걸린 한 형제가 예수님께 자기를 던지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사람들을 뚫고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 발 앞에 자기를 던지는 모습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맡기지 않는 이상 그것은 인정이지 믿음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에 자기를 맡길 때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드신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성도의 바른 모습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선포했다. 자신들의 사상이나 생각을 복음에 섞지 않았다. 이 순수한 복음 위에 성령이 임하셨던 것이다. 변질된 복음에는 결단코 성령이 임하실 수 없다. 

로마서 5장 5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씀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하나님 사랑이 넘쳐흐르는 상태를 성령의 충만이라고 말씀한다. 

사람들이 어떤 지적인 깨달음이나 신앙적인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서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정말 나는 죄인일 뿐이고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다고 간증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주님 앞에 루터의 말처럼 의인이지만 죄인으로 끊임없이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은혜 속에 사는, 은혜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바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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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인간의 처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유토피아를 찾는다. 정말 인간이 악하고 얼마나 일그러졌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그 모습을 우리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을 우리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결단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그 모습을 우리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을 우리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결단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의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을 구하고 받는 것이다. 인간의 의는 결단코 하나님 앞에 받아드려질 수 없고 그것은 불살라질 뿐이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는 총체적으로 자기 자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주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님의 양심 곧 그분의 절대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에 오늘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심지어는 우리가 하는 종교적 행위, 신앙의 행위까지도 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구원받고, 자기가 행복해지기를 원해서 하는 죄(이기심)의 흔적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에도 끝까지 그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보이셨다.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셨다. 자기를 죽이는 하나님의 손에 영원한 죽임을 당하시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믿음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어서, 구원 얻고 싶어서 믿는 믿음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 그 믿음을 나중에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될 때 우리도 그리스도의 마음과 본성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의’에 대한 약속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말씀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죄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니다. 죄의 본성, 그 자체가 죄인 것이다. 히브리말로 ‘죄를 짓는다’는 말을 할 때는 항상 ‘하타’ ‘빗나간다’는 동사를 쓴다. 하나님의 가슴속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가슴과 내 사랑의 가슴이 맞아져야 되는데 맞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물 위의 기름처럼 그래서 빗나갈 수밖에 없다. 본질이 같아야 합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빗나가다 못해서 구부러진다는 뜻이다. 히브리말에 ‘아와’ ‘구부러진다’는 말이 있다. 

‘죄를 짓는다’는 말 가운데 또 하나는 ‘파샤’ ‘등을 보인다’, ‘반역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합쳐질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이다. 

또한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다. 정말 많은 이들이 죄를 범하는 것만이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말 위험한 사상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물론 죄를 짓는 것도 죄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가 죄에 동의하는 것도 죄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본성, 그것은 변하지 않는 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죄를 짓는 것도 죄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가 죄에 동의하는 것도 죄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본성, 그것은 변하지 않는 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1장 4절,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우리의 종자가, 우리의 씨가, 우리의 유전자가 악의 종자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역대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20세기에 유토피아, 이상적인 세상을 원했지만 이 20세기야말로 세계대전이 2번이나 일어났고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제는 아주 본질적으로 죄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로마시대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상태로 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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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로마서에 나타난 유대인의 죄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유대인의 죄는 항상 똑같다. 표리부동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짓는 죄 중에 하나가 자기들의 의의 표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판단하는 것이다. 심판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본성적인 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절대적인 이타심)을 표현한 율법의 본질, 바로 그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심판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덕적인 신앙의 잣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재고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이다. 특별히 잘 믿어보겠다는 이들이 이런 우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절대적인 이타심)을 표현한 율법의 본질, 바로 그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심판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정말 사랑하지 않고는, 용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 예수님의 가슴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음을 당하시지 않으면 견딜 실 수 없었던 그분의 사랑에, 죄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지만 죄인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면 견디실 수 없었던 그분의 사랑의 본성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기를 간절히 바란다.

키워드 : 믿음, 맡김, 의탁, 성령충만, 하나님의사랑, 의, 죄, 본성, 율법

성경구절

  • 야고보서 2장 19절
  • 요한복음 2장 23,24절
  • 요한복음 1장 12절
  • 갈라디아서 6장 14절
  • 로마서 5장 5절
  • 마태복음 6장 33절
  • 누가복음 18장 13절
  • 누가복음 23장 46절
  • 로마서 3장 10절
  • 이사야 1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