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by blog posted Jan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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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의 복음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죄의 문제,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제 이 복음에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흔히 바울의 로마서를 칭의의 복음이라 한다. 부를 ‘칭(稱)’, 의로울 ‘의(義)’자, ‘의롭다고 불러주는 복음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칭의의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죄인이 자신의 죄, 그 죄가 얼마나 크고 절망적인지를 깨닫고 느끼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의 로마서를 칭의의 복음이라 한다. ‘의롭다고 불러주는 복음이다’이 칭의의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죄인이 자신의 죄, 그 죄가 얼마나 크고 절망적인지를 깨닫고 느끼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모든 사람이란 바울이 1장부터 3장 사이에 세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첫째로 로마서 1장에서 그는 이방인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 2장에서는 유대인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 세 번째로 그가 로마서 7장에서 이미 예수님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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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이방인들의 죄는 무엇인가? 로마서 1장 32절에 결론적으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방인들의 죄는 하나님의 법 자체를 무시하고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불법을 옳은 일이라고 정당화한다. 그것이 이방인들의 죄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두 번째, 유대인들의 죄는 무엇인가? 로마서 2장 21~24절에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하는 그들의 죄는 23절에 말한 대로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사도바울의 지적은 이것이다. 율법을 가르치는 네가 그 율법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율법을 모르는 짐승과 같이 취급을 했다. 그러나 어쩌면 유대인들은 그렇게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였지만 본인들은 여전히 그 죄를 실제로 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위 표리부동한 위선적인 삶을 살았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세 번째, 그리스도인의 죄는 무엇인가? 바울이 로마서 7장 15~17절 가운데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이제는 선한 것을 알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또 내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죄악의 본성을 따라서,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 악을 범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 17절에 이제는 죄악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이 그렇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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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이성

바울이 로마서 7장 24, 25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카르디아’라는 단어가 아니고, ‘누스’라는 단어이다. 소위 ‘이성’이라고 자주 번역되는 단어다. 

이 ‘누스’라는 단어를 바울은 로마서에서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로마서 12장 2절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로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이 말이 ‘누스’라는 단어이다. 소위 감성이 아닌 죄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 도덕적인 판단력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마음’으로는, ‘누스’로는,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지만 우리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는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또 우리 몸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될 그날이 우리에게는 정말 소망으로 기다려지는 날이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이 말이 ‘누스’라는 단어이다. 소위 감성이 아닌 죄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 도덕적인 판단력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마음’으로는, ‘누스’로는,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지만 우리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는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서 바울은 그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재림의 날이라고 말씀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다. 물론 이 죄의 본성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점점 약해져서 그것은 드디어 거의 지워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본성의 뿌리는 여전히 재림 때까지 남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문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복음, 의, 회개, 믿음의 기본적 의미

로마서 3장에 나타난, 바울이 말한 의, 회개, 믿음 이 주제들에 대해서 조금 더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상세하게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복음’이라는 말은 ‘기쁜 소식’이다. 복 받는 소식이 아니다. 물론 복 받는 소식이라고 번역해도 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래 뜻이 메시야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기쁜 소식을 ‘복음’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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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의’라는 말은 무엇인가? 의는 신명기 6장 25절에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율법 자체가 가리키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바울이 로마서 2장 28절에 말씀한 것처럼 의문, 즉 글자를 따라서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여러 문자적인 법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율법의 전부가 아니다. 

로마서 2장 28절,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율법은 더 깊은 더 중요한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면 본능적인 사랑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의’에 대해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 사이에 자세히 말씀하셨다. 특별히 마태복음 5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이상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 조상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아담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과 같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에게 끊임없이 주어졌고, 아담이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분의 능력을 받아서 그는 얼마든지 하나님처럼 다 주는 사랑, 본능적인 사랑, 절대적 이타심의 사랑을 행할 수가 있었다. 곧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그 본질적인 ‘의’를 이룰 수 있었다. 그 ‘의’를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타락해서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진, 사랑할 수 있는 기능, 용서할 수 있는 기능이 다 망가져 버린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율법에 대한 말씀에 알러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의 삶에 통해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셔서, 완전한 사랑을 이루셔서, 끝내는 그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을 범한 모든 불의와 우리가 저지를 모든 죄를 다 해결하시고, 당신이 평생 이루어놓으신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그 사실 때문에 은혜라는 말은 너무나 중요한 말이다. 

그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을 범한 모든 불의와 우리가 저지를 모든 죄를 다 해결하시고, 당신이 평생 이루어놓으신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그 사실 때문에 은혜라는 말은 너무나 중요한 말이다.

예수께서 이루신 그 ‘의’, 율법이 말하고 있는 그 본래의 요구 즉 절대적 사랑, 본능적인 사랑, 그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겨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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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못한다. 복음은 로마서 3장 31절의 말씀처럼 오히려 그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도 바울도 이 율법을 항상, 완전히 다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갈라디아 3장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은 거기에 헬라적 개념으로 ‘항상’이라는 시간적 개념도 집어넣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킬 뿐만 아니라 항상 지켜야 된다고 말씀한다. 그렇게 못하는 것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내리는 저주라는 말은 우리를 괴롭히고 못살게 하고,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드는 그 죄를 없애는 것을 저주라고 한다. 죄인이 그 불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저주에 함께 죽는 것이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자신을 던질 때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꺼이 받아 주시고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두 번째 단어, ‘회개’라는 단어를 본다. ‘회개’라는 단어는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셨다. 히브리말에 ‘회개한다’는 단어로 ‘슈브’라는 동사가 있다. 또 하나의 동사는 ‘나함’이라는 동사로 ‘깊이 숨을 쉰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위로 한다’ 혹은 ‘탄식 한다’ 두 가지 모양으로 번역이 되었다. 후회하고 탄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회개가 아니다. 회개란 ‘슈브’,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 잃은 양, 잃어버린 은전, 그리고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를 설명하실 때 똑같은 결론은 ‘돌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될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나 은전을 찾은 것이나 또 양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다 자신들이 스스로 돌아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데리고 오셨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2장 4절에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이끌어 회개케 하심을 어찌 모르느냐고 하신다.

그것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준 비유가 잃은 양의 비유이다. 잃은 양은 스스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목자를 떠나서 자기 스스로 자행자지한 것을 슬피 후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간 것은 목자가 집을 떠나 양을 찾으러 나와서 양을 찾은 다음에 그것도 양을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양이 걸어오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 양을 너무나 사랑해서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그리고 목자가 집으로 돌아온 사건을 ‘회개’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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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란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데려 가는가? 누가 우리를 데려 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우리를 찾으신 다음에 기꺼이 예수님의 등에 우리를, 병들고 죄 많은 몸을, 그분의 용서의 어깨위에 맡길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업으시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셔서 잔치하시는 것이다. 

다음에 얘기 하겠지만 ‘믿음’이란 단어는 ‘맡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를 찾아오신,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오신 주님의 용서의 어깨위에 우리의 죄로 상하신, 우리 죄를 다 갚으신 그분의 어깨위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이다. 회개, ‘돌아가는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업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회개란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우리를 찾으신 다음에 기꺼이 예수님의 등에 우리를, 병들고 죄 많은 몸을, 그분의 용서의 어깨위에 맡길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업으시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셔서 잔치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는 참으로 우리에게 더 깊은 감동을 준다. 양 같으면 ‘주인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아픕니다’라고 소리라도 질렀을 수 있지만, 이 은전은 전혀 말도 할 수 없었고, 소리도 지를 수 없었고,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정말로 속절없는 이 은전을 주인은 불을 켜들고 기어코 찾아내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어쩌면 소리 한마디 지를 수 없는, 양심의 가책조차 전혀 없는 그런 불쌍한 은전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찾아내셨다. 등불을 켜들고,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켜들고 우리를 기어코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손에 다시 쥐셨다. 

키워드 : 로마서, 칭의, 죄, 이방인, 유대인, 그리스도인, 의, 회개, 믿음, 잃은양, 잃어버린은전, 탕자

성경구절

  • 로마서 3장 23절
  • 로마서 1장 32절
  • 로마서 2장 21~24절
  • 로마서 7장 15~17절
  • 로마서 7장 24,25절
  • 로마서 12장 2절
  • 빌립보서 3장 21절
  • 신명기 6장 25절
  • 로마서 2장 28절
  • 마태복음 23장 23절
  • 마태복음 5~7장
  • 마태복음 5장 20절
  • 로마서 3장 31절
  • 갈라디아서 3장 10절
  • 누가복음 15장
  • 로마서 2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