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령을 거역하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령, 왜 거룩의 영이라고 했는지 계속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 성령, ‘하기오스 푸뉴마 ἅγιος πνεῦμα’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의 영, 성령이다. 예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말로 거역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 거룩의 영을 말로 거역하면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왜 이런 표현이 나타났는가? 왜 예수님은 거역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성령 하나님을 거역하면 용서를 받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거리가 된 말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16장 14절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영광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전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면장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사면장, 용서하는 그 사면장을 실제로 전달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용서를 했느냐 안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하신 그 은혜를 전달하는 성령님을 거역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 성령을 거역하고 거절하는 것은 더 이상 어떤 다른 방법도 없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용서하신다. 우리가 아무리 반역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할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문제는 그 용서를 마지막으로 전달하시는 성령을 거역하면 용서해 놓은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그리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십자가의 용서에 나 자신을 맡기든지 아니면 나 스스로 내 죄를, 내 인생을 결산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져다주시는 그 용서의 사면장을 전달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사면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전달자라는 것이다. 끝까지 그 용서의 사면장을 거절하면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성령을 거역 한다’하는 말씀은 ‘용서를 거역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용서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 일을 계속해서 마지막 거절할 때까지 호소하고, 호소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을 끝까지 거절하는 것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했다(요일5:16).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욕하고 저주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회개하여 사망에 이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지만 문제는 그 용서 자체를 거절하는 것은 용서받는 기회를 없애므로 더 이상 구원 받을 길이 없다.
흔히 사람들이 묻는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중간에 타락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에 말하기를 한 번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에 참예한 사람이 타락하면 다시는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맞느냐고 질문한다.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히브리서 6장 4절로 6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마지막 상태이다. 성령을 거역한 마지막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중간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얘기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돌아오도록 호소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가슴으로 돌아오도록 호소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사도행전 5장 30절과 31절에, 분명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임금과 구주를 삼으신 것은 그 임금 되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너희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서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임금이 되신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를 용서하신 분이 임금이 되셨다. 판사가 되셨다. 재판장이 되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소위 어떤 분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변호사가 판사가 된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 용서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죄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에 어떤 죄가 올라와도 무조건 그것은 용서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그 사면장을 전달하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이다. 용서는 다 끝났는데 용서를 거절하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 히브리서 6장 4절로 6절에 말씀하신 그 말씀이다. 끝까지 거절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기억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아서, 용서를 거절해서 구원을 못 얻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성령의 호소를 끝까지 거절한 상태로 굳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성령을 거역한 죄의 결과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 본인이 선택한 그대로를 하나님은 받아들이시고 그 본인의 선택한 그대로 결정할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하는 그 말씀에 보면 그것은 분명히 수동태이다. 히브리말로는 ‘아라르’라는 동사인데 이것은 ‘묶는다’는 뜻이다. 자신을 사단에게, 죄에게 자기를 묶어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하십시오 하고 ‘자신을 맡겨서 묶여진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말로 읽으면 그렇다. 결국은 본인이 술이나 마약이나 죄악에, 세상에 돈과 명예, 탐욕, 정욕에 자기를 묶어 주십시오. 묶여져 살기를 원합니다, 하고 자기를 맡긴 그 결과이다.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하나님의 용서,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끝까지 거절하고 나는 죄가 좋습니다. 돈이 좋습니다. 세상에 TV가 더 좋고 쾌락이 더 좋습니다 하고 자신을 사단에게 맡겨서 묶여진 사람을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계속 거절하는 상태가 결과적으로 확정이 된 사람들이다. 그렇게 확정이 된 상태를 성령을 거역한 죄라고 부르고 있다.
성령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호소하고 또 호소하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의 성령도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개인마다 다 다르다.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을 화인 맞았다고 한다. 불로 달구어진 벌건 쇠도장으로 소 엉덩이나 짐승 엉덩이에 찍는데 그것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있다. 새살이 올라오지 않는다.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을 불도장, 화인 맞았다고 표현한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끊임없이 역사하시고 끊임없이 호소하시고 계신다. 가장 비참한 형편은 그 성령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나는 시간이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오늘,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시간이고 구원의 시간이다. 회개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인 것이다. 지금이다! 다음 순간이 아니다. 바로 지금이다! 성령은 끊임없이 바로 지금이라고 호소한다. 지금 결정하라고, 내일이 아니고 바로 지금이라고 호소하신다. 이 은혜에 우리가 머물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12장 32절
- 마태복음 12장 32절
- 요한복음 16장 14절
- 요한일서 5장 16절
- 히브리서 6장 4절로 6절
- 사도행전 5장 30절과 31절
- 마태복음 25장 41절
- 고린도후서 6장 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