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믿음의 두 가지 국면

by blog posted Jan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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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헌장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말씀이 구약성경 하박국서 2장 4절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바벨론이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이 이 나라 저 나라를 집어삼키면서 특별히 이스라엘 나라도 이렇게 침공하면서 많은 의인들을 악인들과 함께 죽이는 잔인한 침공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함께 의인을 죽게 하시는가?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어떤 강력한 질문, 어떤 면에서는 도전적인, 하나님을 향해서 대답하시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신 말씀이다. 하박국 2장 4절,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유명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헌장이 나와 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 한글 성경은 좀 명확하지가 않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어떤 물건을 가리키는 것인지, 지시 대명사인지, 인칭대명사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런데 영어성경을 보면, 인칭대명사이다.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르틴 루터 이후에 종교 개혁자들이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이 말씀을 신약에는 3번 인용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말씀들이 인용된 구절들은 아예 ‘그의’라는 말 자체가 빠져있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되어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성경전체의 문맥으로 보면, ‘그의’라는 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의인이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할 때에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논란이 있어 왔다. 

유대인들은 ‘그의’ 할 때 ‘그’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약에 이 말씀이 사용될 때에 ‘그의’라는 말이 아예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그냥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래서 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원전이었던 하박국서 2장 4절 말씀은 누군가가 분명히 ‘그’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루터 이후의 종교 개혁자들은 일반적으로 ‘의인의 믿음으로’ ‘그’가 바로 ‘의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 해석을 해왔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진 성경, 구약성경 원어인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 성경 즉, 70명이 모여서 번역을 했는데 똑같았다고 해서 70인 역이라고 한다.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만큼 번역이 잘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70인이 똑같이 번역했다 고하여 70인 역이라고 한다. 

그들이 가진 70인 역 성경에 의하면, ‘그의 믿음으로’라는 말을 ‘나의 신실함 속에서’라고 번역했다. 헬라어의 믿음이라는 단어는 ‘피스티스(πίστις)’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원래,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에는 ‘에무나(אמונה)’라는 단어이다. ‘에무나(אמונה)’는 믿음을 가리키고 ‘믿을 만하다’ ‘미쁘다’ ‘신실하시다’는 뜻이다. 

이 말이 이렇게 번역이 되었는데 ‘에무나(אמונה)’라는 이 말이 본래 가지고 있던 뜻 중에 하나인 ‘신실함으로’라고 이해해서 신약성경에 기록한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는 아예 ‘신실함’이라고 번역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본인이 가진 믿음으로 산다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하나님의 신실하심’ ‘성실하심’ ‘절대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함 속에서 살 것이다’고 유대인들은 이해했다. 

예수님의 믿음

그렇다면 어느 말이 맞을까? 의인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서 사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변하지 아니하시는 그의 신실하신 사랑 속에서 의인이 사는 것인가? 성경에는 그 이야기가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난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할 때 예수님 자신이 가지셨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믿음도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란 말로도 예수님의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어느 것도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의인은 단 한 사람뿐이다.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대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예수님뿐이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한 말씀이 있다. 누가복음 23장 47절에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의인은 바로 예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의인의 원형이었던 예수님, 예수님의 삶을 쳐다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신 믿음으로 사셨다. 

말씀드린 대로 그분은 자기 마지막 목숨까지도 맡기신다. 자기를 죽여서라도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죄 많은 불쌍한 자식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해달라고 자기를 완전히 맡기신 믿음으로 사셨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가지셨던 예수님이, 죄인들이 자기들을 주님께 맡길 때에 그들의 맡기는 그 믿음을 받아들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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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를 들어 보면, 요한복음 5장 30절에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 바다 물 위를 걸으셨던 그 때에는 분명히 자기 힘으로 걷지 아니한 것이 확실하다. 그는 아무것도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자기를 완전히 맡기셨던 그 맡기신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을 잡고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에 빠져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자기를 맡긴다. 그 때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붙들었던 그 믿음으로 베드로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구원을 이룰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의인 자신이신 예수님이 그의 삶에서 나타낸 믿음, 자신의 믿음,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셨던 그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자기에게 모든 걸 맡기는, 자기를 믿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여기 예수님은 “의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 속에서 살 것이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분명히 ‘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되는데 ‘안에’라고 되어있다. ‘베’라고 하는 전치사인데, 이 ‘베’라는 전치사는 ‘속’을 가리킨다. 

그것을 영어로 ‘by’라고도 번역할 수 있지만 본래 말은 ‘in the faithfulness’이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신실하심 속에서 의인이 살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히브리 사람들이 이해했던 성경 말씀이다. 물론, 당연히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용서받은 의인들이라고 표현한 죄인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그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하는 얘기도 틀리지 않다. 

성경은 그 두 가지를 이야기를 다 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완전히 맡기셨던 그 믿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는, 예수님께 자기를 맡기는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는 그 믿음도 주님은 같이 말씀하셨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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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하박국 2장 4절
  • 로마서 3장 10절
  • 누가복음 23장 47절
  • 요한복음 5장 3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