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회복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아벨과 가인의 제단에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 차이점은, 다시 반복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사단이 어떻게 하나님의 제사를 변질시켰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기희생, 자기 손으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셔야만 했던 그 무한한 희생, 그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희생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 아니면 결단코 죄인의 죄가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변질시켜놓았다.
로마서 7장 10절,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이 하나님의 품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시다.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말씀이었다.
우리 부모가 자식들에게 대하는 모든 이야기도 역시 그렇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것 해라, 저것은 하지마라, 이것 먹어라, 저것은 먹지 마라, 이 옷 입어라 하는 모든 것들은 다 그 자체가 부모의 사랑의 표현들이다. 부모가 하는 말을 자식이 짓밟을 때 그 엄마를, 그 아빠를 짓밟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과 존재를 짓밟아버린 그 죄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그것을 갚을 수 있는 길이 없다. 다시 말하면 천사나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를 회복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짓밟혔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범했고, 천사가 죄를 범했고, 누가 범했을지라도 하나님 자신이 짓밟히셨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사람도, 어떤 천사도 회복시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라는 존재밖에는 회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한번은 서울에 어느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의 오래된 이야기이다. 벤츠를 몰고 가던 운전사가 앞에 있는 노란 등을 보고 조용히 섰는데 뒤에 따라오던 포니 승용차에 타고 있던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노란신호등에 혹시나 앞차가 갈까하고 급히 차를 몰았는데 앞차가 정차하는 바람에 뒤에 와서 정면으로 벤츠를 들이받았다. 그 때 벤츠 기사가 조용히 차문을 열고 키를 가지고 나와서 젊은 포니 승용차 주인에게 말없이 그 키를 넘기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 차를 아무리 잘 고쳐도 본래 상태로 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멍이 들었기 때문에 이 차는 당신이 가져가고 이 똑같은 차를 사다 줘라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이 망가졌을 때, 자기 자신이 짓밟혔던 것이다. 누가 짓밟았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짓밟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 아니면 어느 누구, 어느 존재도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존재를 짓밟은 그 결과를 회복시킬 수 없었다.
속죄의 값
그래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사람이 갚아야 되는 죄 값을 갚으신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꼭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꼭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천사가 와서 혹은 의인이 그렇게 해도 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다.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엄청난 희생, 하나님의 율법이 짓밟혔을 때 하나님이 그 값을 치르시고,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인간이 당해야 되는 형벌을 인간이 되어 오셔서 갚으시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인간이신 육체 속에서 그 죄 값을 치르실 때에 함께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속죄의 값이 무한하다고 표현하는데 그 속죄의 값이 무한한 것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하나님, 그가 비록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은 떠나지 않으셨다.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그 권세를 잠시 포기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 속에서, 인간 예수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영원한 죽음을 함께 당하셔야만 했다.
돌아가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그 하나님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육체 속에서 죽음을 함께 경험하셨다. 그것은, 정말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율법의 저주
이 제사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죄인의 죄 값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번제단을 보면 중간에 그물로 된 석쇠가 놓인다. 그 위에 나무를 올리고 그 나무 위에 양을 벌려서 가지런히 놓는다. 그 이유는 양은 잡으면 옆으로 눕기 때문에 벌려지지 않는다.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양을 열 토막을 내어서 그 나무위에다 가지런히 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불에 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양 위에 보이지 않는 죄인의 죄가 올려졌다. 문제는 이것이다. 보이지 않는 죄인의 죄이다. 이 죄를 태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불이 내려온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내려온다. 결론은 죄인의 죄를 태우고, 양을 태우고, 나무를 태운다. 다 태운다. 이 나무는 갈라디아 3장 13절에 분명히 율법의 저주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이다.
나무와 저주라는 단어는 창세기 3장 14절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선악과를 따먹고 손과 발을 잃어버린, 날개를 잃어버린 뱀이 매달려있는 모습이다. 결국은 땅에 떨어져서 배로 기어 다니는 짐승이 된다. 이 선악의 지식은 곧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가리켜주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율법이었다. 그래서 율법의 나무에 매달렸다는 말이 정답이다.
양은 당연히 예수님이시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 위에 죄인의 죄가 올려 졌는데, 안수이다. 반드시 죄인이 죄를 양 위에 옮겨야 된다. 주님께서 쓰신 가시관이다. 창세기 3장 18절에 죄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를 그가 머리에 면류관으로 쓰신 것이다. 이렇게 죄인의 죄가 올려 졌을 때 하나님께서 이 심판의 불을 내리셔서 죄인의 죄와 양과 나무 전체를, 다시 말하면 율법의 저주와 예수님과 그리고 죄인의 죄를 다 태우시는, 심판의 불로 임하신다.
결국은 죄인의 죄 값이, 죄가 사라지는 것이다. 법에 의한 심판이 끝난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된다. 사법적인, 법적인 절차가 끝이 난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 하셨다고 했다. 헬라어로 표현하면 아벨과 아벨이 드린 제물인 양을 불태우셨다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이것이다. 나무는 이미 올리어져 있고 제물은 양이다. 그 다음에 올린 것이 아벨의 죄이다. 아벨의 죄를 태우셨다.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아벨을 태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4:4). 아벨의 죄가 무엇인가? 아벨 자신이다. 아벨의 죄는 바로 아벨 존재 자체이다.
그의 죄, 그의 유전자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유전자, 사랑이 안 되는 유전자, 용서가 안 되는 유전자, 하나님의 율법이 지켜지지 않는 유전자이다. 아벨은 제물에 올려지고 아벨은 양과 함께 태워진바 되었다. 사랑도, 용서도 되지 않고, 율법이 지켜지지도 않는, 회개도 되어지지 않는 아벨을 사르시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벨을 창조하신다.
아벨이 죽었다. 그의 죄는 제단위에서 죽었고, 얼마 후에 그의 육체도 형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 그는 이제 부활만을 기다리고 있다. 새 생명으로, 죄 없는 유전자로 부활할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번제단 위에서 죽었고 형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 육신도 그의 죄도 죽었다. 그는 이제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 죄인의 죄 값을 치르신 분이, 곧 제사의 주인이 누구인가? 불을 내리셔서 죄를 사르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아벨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심부름을 했을 뿐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을 뿐이다. 양을 데려오라니까 데려왔고, 죄를 안수하라 하니까 안수했고, 죽이라고 하니까 죽였고, 올리라고 하니까 올렸을 뿐이다. 태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예수님에게 죄를 옮기라 할 때 옮기시고, 순종하라 할 때 그 제사에 순종하셔서 우리 모두가 이 아벨의 제사에 동참하게 되기를 바란다.
태그:가인,아벨,제단,사단,제물,율법,품성,죄 값,십자가,속죄,제사제도,어린양,부활,순종
성경구절
- 로마서 7장 10,12절
- 갈라디아 3장 13절
- 창세기 3장 14절
- 창세기 3장 18절
- 창세기 4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