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전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가인과 아벨의 제단(예배)의 차이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도록 한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제사의 목적은 분명히 ‘죄’를 제거하는 일이다. 왜 쓸데없이 양을 죽여야 하는가? 양을 사랑하시는, 동물을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정말로 개미 한 마리 죽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는 우리 아버지, 사랑이신 아버지가 어떻게 짐승들을 그렇게 무참히 죽여서 제사를 드리게 했겠는가? 아버지의 마음을, 심정을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요즈음에 동물 애호가들은 일예로 모피를 입지 않는다. 동물을 사랑하는 모습을 이런저런 모양으로 많이 보여주시고 있는 것에 대해서 환영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불가피하게 양을 죽이셔야만 했다. 예수님을 나타내는 그 양이 희생을 당하지 않는 이상 죄인이 용서받고 살길이 없다. 그래서 그 많은 양들이 성소에서 죽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애꿎은 양들이 죄인의 ‘죄’를 짊어지고 속죄의 양으로 죽어야 되는데 죄인이 ‘죄’를 옮기지 않아서 그냥 무참하게 양들이 학살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원치 않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양이 죄인의 ‘죄’를 뒤집어썼을 때, 곧 ‘죄’를 전가 받았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이 양은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지는 속죄양이 된다. 속죄양이 되려면 반드시 죄인의 ‘죄’를 뒤집어 써야한다. 성소는 양을 잡는 푸줏간이 아니다. 성소는 도살장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는 교만과 이기심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양을, 짐승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요나서 4장 11절에 보면 요나가 박 넝쿨 하나를 그렇게 아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라고 하셨다.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갈 것은 이 양을 죽이는 일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죄인이 자기 손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양을 데려다가 자기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 양을 죽이면서 자기 ‘죄’가 얼마나 기가 막힌, 참으로 말할 수없는 고통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케 하시는 은혜였다.
여러분, 사랑하는 내 개에게 내 ‘죄’를 다 뒤집어씌우고 그 다음에 개를 나대신 죽여서 ‘죄’를 없애고 내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여러분, 그렇게 쉽게 못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시키셨는지를 보여주고 계셨다.
"죄"의 해결
비록 우리는 짐승을 죽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이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직접 죽이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자세히 보기로 한다. 이 가인과 아벨의 제단에 가장 큰 차이점은 불이 내리고, 불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태우는, ‘죄’를 제거하는 불이 내렸다. 가인의 제단 위에는 ‘죄’를 제거하는 불이 내리지 않았다. 결국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
이 ‘죄’를 제거하시는 일, 실제로 불로 태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제사의 주인이 다르다 하는 말로 설명드릴 수 있다. 제사의 주인이 다르다. 아벨 쪽 제사의 주인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다른 쪽 제사의 주인은 가인이다. 가인이 자기 스스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맡기고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드리라는 제사가 아닌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서 드린 제사이다.
분명히 기억하라,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 두 종류의 제사와 비슷하다. 이 두 제사 중의 어느 한 쪽이다. 내가 만든 신앙, 소위 인간이 만든 신앙이 있다. 사람이 만든 신앙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신앙은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실 때에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다. 그것은 고통이다.
어쩌면 가인은 이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께 복을 많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이 복을 많이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 욕심을 차리겠다는 이야기이다. 부자가 되게 만들어 달라고,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결국은 자기욕심, 곧 ‘죄’를 구하고 있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시험해 보아라, 그러면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면 내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십일조를 잘 드리는 마음의 근본동기가 내가 부자가 되어서 복 많이 받아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라면 그 사람의 근본 마음의 동기는 잘못된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욥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나누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밤새 기도하시고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가 그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 치료의 능력으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하고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제사의 목적
다시 정리한다. 하나님께서 제사의 주인이신데 이 제사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그 아픈 가슴, 당신의 아들을 상징한 양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를 원하셨던 그분의 사랑이 이 제사 속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제사를 드린 사람은 하나님이 나 같은 정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죄인의 ‘죄’를 짊어지시고 자기 아들의 생명까지 희생시킨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랑을, 그 자기 희생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중에 나도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죽을 수 있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이 놀라운 희생을 바로 알고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시키지 않는 제물을 드리고, 그리고 복을 많이 구하던 자기욕심에 가득한 사람들의 예배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아벨의 제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제사를 받은 대상이 누구인가? 바로 사람이다. 죄인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바치셔서, 제물로 바치셔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해결하셨다. 그리고 그 용서를 우리에게 믿음으로 받아달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이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저에게 맡기는 자마다’ 입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맡기는 자, 그게 더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죄를 맡기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결국은 제사를 드린 목적은 그 제사에 자신의 ‘죄’를 완전히 맡겨서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셨고 우리는 그 용서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제사의 목적이다. 그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이,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서, 너무나 감사해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사랑에 감사해서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예배이다.
지난 시간에 배웠듯이, 제사는 하나님이 드리시고 그 제사를 받은 죄인이, 용서받은 죄인이 엎드려 경배하는 것, 절하는 것을 예배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사랑이 이 제사 가운데 나타나 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제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의 종류가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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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요나서 4장 11절
- 요한복음 3장 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