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

by blogmaster posted Jan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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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사랑의 대화이다

다시 한 번 유다서 1장 20절을 보면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는 ‘~으로’라고 번역된 이 말은 ‘안에서’라는 뜻이다. 헬라어의 ‘엔(en ἔν)’이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영어에 ‘in’이다. ‘in the Spirit’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지난시간에 우리가 공부했듯이 기도는 분명히 사랑의 대화이다. 독백이 아니다. 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뜻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 젖을 먹으면서 엄마와 얘기하는 옹알거리는 그 모습이다. 우리 엄마들은 아이들이 옹알거리는 소리를 다 알아듣는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엄마가 사랑의 얘기를 하면 아이가 알아듣고 까르르 웃는다. 안다. 왜 그럴까? 유전자가 같기 때문이다. 소위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소위 유전자 공유 상태에서의 사랑의 대화이다. 어렸을 적에는 엄마하고 딸이지만 조금 나이 들고 이제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살면 엄마가 친구가 된다. 더 나이가 들어서 엄마가 늙으면 엄마가 딸이 되고 딸이 엄마가 된다. 옛날에 자기에게 기저귀 채워주던 그 엄마가 이제는 누워서 딸에게 이제 기저귀를 받는 그런 관계로 바뀐다. 이것은 유전자가 공유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다르다. 친정어머니는 유전자가 같기 때문에 엄마가 어떤 모습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다 알아듣는다. 엄마가 딸을 알듯이, 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이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고린도전서 2장 10, 11절의 말씀대로 성령이 하나님 안에 계신다. 하나님의 심정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다. 다시 얘기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품에 안으실 때는, 성령은 하나님 안에 계시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 성령 안에 우리가 있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로 변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같은 정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기도한다. 유전자가 같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불행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주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줄 수 있도록,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기도를 한다. 나누어 주기 위하여 받는 기도를 한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오늘 날 특별히 우리는 거의 그 수준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 자신의 행복과 내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내 자식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다른 영혼들을 위해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처럼, 우리 아닌 다른 영혼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곧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도하는 것을 성령으로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스가랴 12장 10절에, 먼저 이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와야 한다.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 은총 따로 있고 간구하는 성령이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니다. 영어는 잘 번역했다. 영어는 은혜의 성령 그리고 간구의 성령, 지난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이게 다 형제 말이다. 영어나 우리말은 완전히 다른 말로 번역했지만 이 말 자체가 같은 ‘헨(chen חֵן)’ ‘따하눈(tachanun תַּחֲנוּן)’ 똑같은 아버지를 가진 단어들이다. 이 은혜나 간구라는 것이 같은 집안이다, 딴소리가 아니라 같은 소리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오지 아니하면, 곧  지난시간에 배운 들숨, 이것이 오지 아니하면 기도는 안 되는 것이다. 간구는, 기도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우리가 자신을 맡기게 되는 간구의 기도가 된다.

에베소서 2장 8절 공식에 대입하면 똑같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자신을 맡기는 믿음의 간구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온다. 같은 내용의 공식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와야 한다.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오지 않는 이상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간구는 드려지지 않는다.

그것을 누가 하는가? 바로 성령께서 하신다. 이 성령이 임하지 않으시면 은혜도, 간구도, 믿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성령을 부으셔야만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간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되기 전에, 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우리가 타락하기 전에, 회개하기 전에, 영원 전 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 그 은혜를 이미 주셨다고 말씀한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몇 번 강조하고 강조해도 과하지 않은 은혜로운 말씀이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다. 영원 전부터 주신 은혜이다!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우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다음에 아, 물이 필요하구나, 햇빛이 필요 하구나, 공기가 필요하구나, 그래서 그렇게 그 다음에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햇빛도 공기도 물도 다 만들어 놓으셨다. 꽃도 나무도 먹을 것도 다 만들어 놓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신다.

옛날에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다. 꼭 집을 지을 때는, 나를 손잡고 데리고 가셔서 집짓는 목수들에게 아주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한다. 잘 부탁합니다, 우리 아들 장가가서 살 집입니다. 늘 그러셨다. 그래서 집이 완성이 되면 그 집에 이사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 똑같이 하셨다. 공기도 물도 햇볕도 먹을 것도 꽃도 나무도 하늘도 모든 걸 다 만드셨다. 다 만들고 맨 마지막 날,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신다. 아들을 딸을 만드셨다. 그리고 마련해놓으신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네 것이라고 주신다. 그게 창조의 이야기이다. 사랑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가 타락해서 잘못되면 그걸 아시고 영원 전 부터 은혜를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창조하신다. 주신 은혜가 1번이고 2번이 창조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창조하신다. 그래서 창조 전에,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 하기 전에, 영원 전에 이미 그 은혜를 주셨다고 성경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서를 한 번 더 정리한다. 1번이 은혜이고, 2번이 창조, 3번이 타락, 범죄이다. 4번이 이 주신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용서의 가슴으로 돌아가는 회개가 4번, 5번은 그 용서를, 이미 영원 전에 주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 그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용서받는다. 용서를 받아들인다.

이미 주신 용서가 코앞에 와 있다. 이미 만드신 공기가 내 코앞에 와 있다. 이제 숨을 들이마시면 되는 것이다.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은, 용서 받는 일은 맨 마지막이다. 이미 용서는 창조 전에 이미 주어졌다. 놀라운 이야기다!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이다. 우리 하나님이, 성령이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미 주신 은혜를, 죄인이 세상의 죄가 좋고 자기가 좋고 쾌락이 좋고 세상의 재미가 좋으니까 그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고 부른다. 앞으로 우리가 좀 보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구속의 날까지 너희가 그 안에서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에베소서 4장 30절에 말씀하신다. 그 하나님의 근심은 용서를, 사랑을 거절당한 근심이다, 계속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다.

성경구절

  • 유다서 1장 20절
  • 고린도전서 2장 10절로 11절
  • 스가랴 12장 10절
  • 에베소서 2장 8절
  • 디모데후서 1장 9절
  • 에베소서 4장 3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