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랑의 숨

by blogmaster posted Jan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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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영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51절 말씀 가운데서 “내가 세상에 줄 것은 내 살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내 살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씀한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요한복음 6장 52절“저가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주어 자기를 먹게 하겠느냐”라고 질문을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계속해서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 63절에 말씀하신 대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께서 실제로 주시려고 했던 살은, 당신의 말씀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을 위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살, 그것은 주님의 몸으로 말씀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냥 소리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씀하는 엄마처럼 몸을 다 주셔서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겨지시면서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곧 그분이 하신 말씀이다. 말씀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그저 단순히 소리로만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십자가에 나타내신 예수님의 희생 속에서 분명히 증명이 되었다. 그것을 예수님이 영이라고 표현하셨다. 

우리가 계속해서 영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영, 이것은 히브리말은 ‘루아흐’ 헬라어는 ‘프뉴마’ 이것은 흔히 다시 얘기하지만 ‘영’ 이것은 ‘숨’이다. 그리고 ‘정신’, 영어로는 실제로 영이라는 단어를 스피릿(Spirit)이라고 그런데 소문자 spirit도 되는 것이다. 스피릿. 이것은 정신을 가리킨다. 혼이라고 번역도 한다. 그것은 그렇게 믿는 분들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다. 상관없다. 속에 있는 속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혼을 다해서 내 속에 있는 내 영을, 내 정신을 다해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 영이라고, 혼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정말 ‘몸을 다해서’ 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너희에게 혼을, 내 정신을, 내 숨을 너희에게 다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죽으심의 모습이다. 그냥 단순히 육체만 던져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닌 것이다. 그분은 온 마음을 다해서 정신을 다해서, 그분의 숨을 다해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죽는다, 내가 너희의 죄 값을 이렇게 갚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6장 63절“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신 말씀인 것이다. 

영을 다해서, 혼을 다해서 말씀하신 것

흔히 어떤 분들이 말을 할 때 혼이 없이 말하는 분들이 계신다. 그냥 입만 열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 혼을 다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대단히 힘이 있다. 영국의 처칠이 독일의 공격을 받을 때에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 국민들 앞에 했던 유명한 연설이 있다. 그것은 여러분의 피와 땀과 눈물을 이 국가는, 영국은 원한다. 그 처칠의 혼을 다한, 자기 목숨과 생명을 다한 그 한마디의 말에 영국이 분연히 일어나서 제 2차 세계대전을 이겨낸다. 정말 그렇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자기의 숨을 다해서, 영을 다해서, 혼을 다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 성경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3장 16절과 더불어 이 성령에 관한 중요한 복음이라고 나는 늘 이야기 한다. 여기 요한복음 3장 16절과 더불어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 감동으로 되었다는 이 말의 헬라어는 숨을,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진바 된 것이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숨이 불어 넣어진바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혼이 불어 넣어진바 된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분의 정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숨이 이 성경말씀 속에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정말 피를 토하는 것과 같은 그런 간절함으로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숨의 저장고라고 흔히 불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숨을 들이마시기를 원하면 성경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내뿜으시는 그분의 사랑의 숨을 들이마시고 그분의 생명의 숨을, 그분의 모든 것을, 혼을 다 하셔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소리를, 그분의 숨을 마실 수 있다.

 

이 생명의 숨을 호흡하고 나면 그 생명의 숨이, 그 사랑의 숨이 밖으로 나간다. 소위 들숨 날숨이다. 들이마시는 들숨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는 날숨이 있다. 그것은 기도이다. 들숨, 하나님의 사랑의 혼을 들이마시고 그리고 날숨이 나가는데 이것은 내 숨이 아니고 밖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그 숨이 나에게 생명을 주고 나가는 숨이다. 그것을 우리가 기도라고 한다.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

이 이야기가 스가랴12장 10절에 나온다. 우리 성경은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이 은총이라는 단어와 간구라는 단어가 본래 히브리어로 보면 형제의 말이다. 은총은 ‘헨(chen חֵן)’이라는 단어이다. 간구는 ‘따하눈(tachanun תַּחֲנוּן)’이라는 단어이다. ‘헨’과 ‘따하눈’은 형제 말이다. 우리말은 전혀 말이 다르지만 이 말의 아버지는 똑같이 ‘하난’ 이라는 ‘은혜를 베풀다’는 동사의 명사들이다. 은총, 이 기쁨으로 주는 사랑의 은혜를 말한다. 이것은 같은 형제이다. 따하눈, 이것은 흔히 간구를 우리가 표현할 때에, 은총의 메아리라고 한다. 사랑에 대한 메아리, 하나님께서 우리게 은총을, 사랑을 퍼 부으실 때, 그 사랑이 우리 가슴에 닿아서 되돌아가는 메아리라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은혜가 우리의 가슴에 부딪혀서 나가는 하나의 날숨이다. 들숨이 날숨이 되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오지 않는 이상 진정한 대화는, 진정한 사랑의 대화는 없다. 그래서 기도를 우리가 듣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대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을 때만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것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데 그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달라고할 수 있다. 

세 살짜리 아이가 칼을 달라는 것과 같다. 여러분, 결코 안 될 일이다. 7살짜리 아이가 ‘아빠, 차 열쇠 주세요’ 자기가 차를 운전 하겠다 그럴 때, 오, 여러분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빠가 스무 살짜리 아들에게 내가 오늘부터 내 차를 너에게 넘기겠다. 면허증을 딴 아들에게 차를 넘기는 것은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우리가 구한다. 왜냐하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 기도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허락하시면 안 된다.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을 들이마시는 일이 먼저 필요하고 그 사랑의 숨이 내게 산소를 공급해 주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날숨은

하나님의 사랑의 숨이 들어왔을 때만 가능한 숨이다. 다시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먼저 구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생명의 법칙이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 먼저 숨을 쉴 수 없다. 밖에서 내 안에 들어오는 숨을 통해서 산소와 생명을 공급받고 다시 내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진정한 기도를 이룰 수 없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독백이다. 자기 혼자 하는 소리다. 사랑의 아름다운 대화는 아니다. 이 성령으로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유다서 1장 20절“성령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6장 51절
  • 요한복음 6장 52절
  • 요한복음 6장 63절
  •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스가랴 12장 10절
  • 유다서 1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