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나타난 참 믿음
지난 시간에 이어서 참람된 믿음과 예수님이 나타내신 참 믿음은 비교가 된다. 무엇이 진짜 믿음이고 무엇이 잘못된 믿음인지를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나타낸 예수님의 믿음에 비교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가운데서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셨을 때는 우리의 믿음의 길이 누구인가? 어떻게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길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 그 믿음이 진짜라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이것이 진짜다, 저것이 진짜다! 라고 얘기한다.
도대체 누가 말씀하는 것이 진짜 믿음인가?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분명히 길을 보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내가 주님을 본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했다. 결국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소리이다.
어떤 분들이 잘못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믿는 것처럼 안 믿으면 틀렸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가셨던 그 모양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바울은 우리와 다르다. 그는 예수님의 삶의 일정만 본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고 한다.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원한다.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하여서 예수님 안에서 함께 죽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님의 자기를 희생하신 그 희생과 그 십자가의 고난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예수 믿고 잘 먹고 잘 사는데 전념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이 본받으려고 했던 예수님의 모습은 아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이 지적인 확신의 믿음, 그것으로 끝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자기최면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구원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믿음과 자기가 만든 구원의 최면을 스스로 걸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찾아보아야 한다.
신명기 8장 3절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 말씀이 마태복음 4장 4절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요즘은 이 ‘모든 말씀’이 아니고 그냥 ‘말씀’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는 자기가 편집한 말씀, 이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 ‘모든 말씀’ 앞에 정직하지 않다. 어떤 자기 생각을 놔두고 거기에다 성경절을 붙여서 자기 생각을 합리화하는 그런,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에 보면 그런 해석법이 있다.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옷을 다 벗고 성경 속에 들어가서 성경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것을 성경 해석하는 분들이 말을 만들었다. 영어로 ‘exgesis’라고 한다. ‘ex’는 ‘밖으로’ ‘밖으로 나온다’ 영어로 ‘out of’, ‘gesis’는 ‘해석’이다. 성경 속에 들어갈 때 모든 자기 것을 벗어버리고 들어가서 성경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eisgesis’, ‘eis’는 헬라어 전치사인데 일단은 ‘에이스’하면 ‘into’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것을 가지고’ 성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성경의 말씀들을 자기에게 다 붙여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자기 것은 안 버리고 여전히 자기 것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성경을 자기 것에 붙여 합리화하고 뜯어 고쳐서 만들어 자기 의견을 가지고 다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이 결코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살펴봐야 한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번 기간에 공부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공부할 때도 동일하다. 장님들이 코끼리 만진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장님들이 안 보이니까 코끼리 코를 잡고 이것이 코끼리이다 하고, 다리통을 잡고 이것이 코끼리이다, 귀를 잡고 이것이 코끼리이다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만 한 번 더 반복하면, 고린도후서 10장 5절,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노니” 이 귀한 믿음을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의지하는 그 믿음이다. 말씀드린 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앞으로도 좀 더 자세히 볼 것이다.
소위 이 참람된 믿음은 많은 경우에 자신의 지적확신, 머리로 믿는 지적확신에서 끝나 버린다. 머리로 하고 그냥 끝인 것이다. 실제로 자기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은 없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만, 이기심, 탐욕, 정욕, 자신의 모든 죄를 다 맡기지 않는다. 여전히 욕심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돈을 사랑한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명예를 구하고 그리고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머리로는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다고 스스로 자기를 최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결코 그렇지 않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두 종류가 있다. 다른 것도 많이 있지만 크게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 중에 병을 고쳐주시는 구원이 있고 또 하나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원이 있다. 둘 다 믿음으로 맡겼을 때 주님이 이루어 주시는 은혜이다. 맡기지 않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고, 자기 이기심과 교만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맡기지 않은 사람을 예수님이 구원하신 일이 없다.
그런데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지적인 확신으로 끝나는 믿음이 오늘날 너무나 많다. 내가 아무리 죄 지었을지라도 예수님이 다 용서하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죄는 안 맡기고 그것을 여전히 누리고 그것과 재미보고 사는 것이다. 즐기는 분들이 계신다. 이 믿음은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는 믿음이다. 그것을 야고보서 2장 23절 이후의 말씀이 분명히 야고보 사도가 말하기를 그것을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야고보서 2장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라합이 하나님을 믿었는가? 분명히 믿었다. 이스라엘의 사자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는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늘과 땅 아래서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것을 다 듣고 알았다.
기생 라합이 믿었던 그 지적인 확신이 그의 믿음이 끝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라는, 행함이라는 열매로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탐 군들을 숨겨주고 피할 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이러한 이 ‘행함’이라는 말을 잘못 오해해서 율법을 내가 행하는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가 율법을 스스로 지키는 행함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다. 아니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14장 6절
- 에베소서 2장 5,6절
- 신명기 8장 3절
- 마태복음 4장 4절
- 고린도후서 10장 5절
- 야고보서 2장 23절
- 야고보서 2장 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