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 아니하시는 사랑의 은혜를 가르키는 믿음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난 시간에 ‘단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믿음,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증거라고 말씀을 드렸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는 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구약과 신약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특별히 사랑의 믿음, 사랑의 변치 아니하시는 은혜를 가리키는 믿음, 그 믿음을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한다.
‘믿음’이라는 말을 히브리말로 ‘에무나’라고 부른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이다. ‘견고하게 하다’ ‘흔들리지 않게 한다’ 그 동사의 명사이다. ‘에무나’ 이것을 흔히 사람들이 ‘신실하다’ 혹은 ‘성실’ 이런 단어로 번역했다. 이와 비슷한 형제단어가 ‘에메트’라는 단어인데 ‘신실’ 혹은 ‘성실’ 혹은 ‘진실‘ ‘진리’로 번역을 했다. 이것도 또한 ‘아만’에서 온 명사이다.
유대인들이 가진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이 신약성경을 예수님이 아마도 히브리어나 그 당시 늘 쓰던 아람어라고 하는 언어로, 이 아람어는 히브리어 사촌격인 언어인데 그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헬라어로 번역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래 그들이 했던 말대로 번역을 해서 또다시 영어로 번역한 성경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성경이 Complete Jewish Bible이라는 번역이다. 이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실 때 그 ‘진리’라는 단어를 이 ‘에메트’로 번역하고 있다. ‘진리’, ‘에메트’가 어떻게 진리인가? 그것은 소위 변하지 않는 것,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변하지 않는 불변의 것이다. 혹은 요즘 하는 말로 ‘검증 된’, ‘이미 검사해서 증명이 된 것이다’는 뜻이다.
‘에무나’는 어떤 면에서 ‘성실’, 즉 변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고 ‘에메트’는 그 변하지 않는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다. 히브리어 학자들이 여러 면으로 설명을 하지만 거의 일맥상통하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삶을 통해서, 그의 말씀을 통해서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믿음으로,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는 헬라어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때 이 믿음은 헬라어로 ‘피스티스’라는 단어이다.
이 ‘피스티스’는 똑같이 ‘피스튜오’라는 ‘맡긴다’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이 말이 히브리어로 보면 이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처음에 말한 ‘에무나’이다. ‘에무나’가 헬라어로는 ‘피스티스’이다. ‘에메트’는 헬라어로 ‘알레데이아’라는 흔히 말하는 ‘진리’라는 뜻이다. 어쨌든 그냥 진리가 아니고 수많은 검증의 과정을 겪어서 ‘확실하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검증된 성실’ ‘신실’ 이것을 ‘에메트’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라는 말씀에서 사용된 ‘믿음’은 구약의 ‘에무나’인데 이 ‘에무나’라는 단어를 Complete Jewish Bible에 의하면 디모데후서 3장 15절의 ‘에무나’를 영어로는 faithfulness 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신실함’이다. 변하지 아니하는 그분의 사랑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서,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그분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분들을 성실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모든 일에 충성스럽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스티스’ ‘성실함’이라는 말을 형용사로 번역한 ‘피스토스’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에 ‘충성된’ ‘충성하는’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그 사람은 정말 믿을 만하다, 무슨 일을 맡겨도 틀림없이 최선을 다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 가운데 자주 예수님을 ‘충성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때 헬라어 ‘피스토스’라는 단어를 쓴다. 대표적인 예를 보면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여기에 예수님을 ‘충성되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 마지막 전쟁인 선악간의 마지막 전쟁이 마쳐 질 때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은 똑같이 ‘충성’이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백마를 타시고 악의 군대와 더불어서 전쟁을 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이 요한계시록 19장 11절 이하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그 이름이 여러 말씀의 이름이 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11절에 보면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그 ‘충신’이 ‘피스티스’이다. 여기서는 ‘피스토스’인 형용사이다.
헬라어는 형용사를 명사처럼 사용한다. 그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명사다. 늘 충성, 변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우리 앞에서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만 충성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충성된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정말 모든 것을 다해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엄마와 아빠가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럴 때 쓸 수 있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실하다 하면 맡은 일에 대해 아주 충성을 다하는 그런 의미로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예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표현은 부모로서, 이사야서 9장 6절에 우리의 영원하신 아버지로 오신 분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의 성실함이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랑, 사랑의 성실함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것이 완전히 증명이 된 장소가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여기서 자식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사랑의 변하지 아니하심, 이것이 우리 같은 죄인들의 가슴에 느껴질 때에 그 사랑의 감동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그런 신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그 사랑의 변하지 아니하심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셨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 말씀하고 있는 그 ‘동일하다’는 표현은 그분의 사랑, 병자들을 사랑하셔서 치료하시고,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함께 먹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 하시고 끝내는 그들의 죄를 지고 돌아가시는,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그 사랑, 그 변치 않는 사랑의 이야기를 믿음, 히브리어로 ‘에무나’ 헬라어로 ‘피스티스’라는 말로 쓴 것이다.
사랑의 변하지 아니함, 사랑의 완전하심의 표현이 거듭거듭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 믿음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을 받을 때에 그 사랑에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맡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받은 믿음이다 고 말씀하신다.
성경구절
- 로마서 1장 16절,17절
- 요한복음 14장 16절
-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요한계시록 3장 14절
- 요한계시록 19장 11,13절
- 이사야서 9장 6절
- 히브리서 13장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