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회개하시는 하나님

by blogmaster posted Jan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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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

이제 거듭남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이 거듭남을 우리의 생각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 5절에 좀 더 구체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나야 된다고 말씀했다. 

물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어떤 이들은 해석하기를 물로 세례(혹은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두 번째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것은 그들의 해석이다. 예수님은 이미 구약에 나타난 말씀을 하셨다. 구약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분명히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으셨다. 너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냐? 네 존재를 밝혀라 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명백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장 25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처음이라는 말은 ‘태초’이다. ‘태초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이 이야기를 요한복음 1장 1~3절에도 말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했던 그 분이 누구라고 했는가? 여기 예수님이 본인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태초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라’ 이 분은 예수그리스도이다. 그가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은 당신이 구약의 선지지자들을 통해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거나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신 말씀이다.

지난번에 공부했지만 마태복음 5장 21절“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 때는 너희가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칼로 사람 죽이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말해봐야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 들일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에게 성질을 내면 그것이 살인이다. 그러면 너무 어렵다고 할 것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주님, 전부 죄군요. 하나님, 해도 너무하십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거의 일 밖에 모르고 짐승처럼 살아온 이스라엘에게는 처음부터 그 말을 하실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냥 몸에 할례만 받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할례가 ‘죄를 잘라낸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육신의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통해서 죄를 잘라낸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너희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예수님은 이혼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했다. 이유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자기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새 여자를 데리고 살고 싶어서 무조건 내쫓는 것이었다. 새 여자를 얻으면 먼저 부인은 여전히 전 남편의 소유였기 때문에 집을 나와도 마음대로 어디로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안타까운 사실에 너무나 기가 막혀서 너희가 정 싫으면 ‘이 사람은 이제 내 여자가 아니니 데리고 가도 좋다’하는 이혼증서라도 써주라 한 것임을, 그래서 너희가 버린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라도 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임을, 모세가 말한 이혼에 대해서 예수님이 다시 해석해 주셨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얼마나 악했으면 그런 식의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겠는가!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여인, 이혼당한 여자에게 재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미 다 알고 계셨다. 그 표현을 예수님이 나중에 설명을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구약에는 이혼이 없다. 남자가 간음을 하면 그 남자는 법에 의해서 데려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혼당한 여자’란 말의 히브리 원어는 ‘버림받은 여자’라는 뜻이다. 간음한 남자는 죽고 그의 아내는 진짜 생과부가 되는 것이다. 이혼을 당했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다시 반복하면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말씀하신 그 말씀은 각 시대와 사회, 그 당시 상황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말씀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감당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주신 분께서 오셔서 본래의 뜻을 다 드러내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모든 말은 내 아픈 가슴속 사랑의 소리였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완전케 하려함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 정말로 그런가? 아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너희가 다 버려버린 율법을 내가 다시 가득 채워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면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거듭났다고 했다. 유대인이 된 신분의 변화를 가리킬 때 실제 거듭난다는 단어를 썼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너무나 당황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유대인인데, 거듭날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시면서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까 너는 독사종자로구나. 다시 태어나야 된다”라고 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내가 이렇게 다 컸는데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됩니까?” 너무나 얼굴이 뜨겁고 당황한 가운데 니고데모가 한 말이다. 그 때 예수님이 다시 한 번 분명히 못을 박아 말씀하신다. “네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약에 이미 하셨던 말씀

도대체 이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에 이미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에스겔 36장 24~28절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우리가 앞으로 몇 번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볼 것이다. 에스겔은 구약의 선지자 중에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말씀을 전한 선지자다. 예레미야는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을 전한 선지자다.

에스겔서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가 되었을 때 그 이스라엘을 끝내 포기할 수 없어서 거기까지 같이 가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에스겔을 통하여 마지막 얘기를 하신다. 그 에스겔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더 이상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에스겔을 마지막 선지자로 보면 된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통곡을 하신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멸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예레미야 자신의 눈물이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끝내 하나님을 버린다. 결심하고 버린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남편이 신부를 버린 것이 아니다. 신부가 신랑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이혼증서를 써 주신다. “너희 마음대로 해라. 마귀에게, 우상에게 시집을 가든지 이제 그건 네 마음이다.”라고 자유를 주신 것이다. 본인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이혼증서가 발급이 되었다. 자유다! 그렇게 하고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고 간 그 여자를 따라가서 또 한 번 더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이 에스겔의 이야기이다.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버리지만 나는 너를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회개를 하시다

호세아서 11장 7절에 기가 막힌 이야기가 거기에 적혀 있다. 북방 이스라엘의 이야기다. 북쪽의 이스라엘 백성,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버린다. 여기 호세아 11장 7절“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인가! “하나도 없도다!” 이때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 

8절,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여기 ‘돌아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이것이 히브리어로 ‘슈브’라는 ‘회개한다’는 단어다. 하나님이 회개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회개를 하신다는 말인가! 무엇을 회개할 것이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떠나가는 이 아내, 죽어도 나는 싫다고 떠나가는 그 아내에게로 다시 돌아서시는 하나님! 버릴 수 없으신 하나님!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내 사랑이 온전히 불붙는 듯 하도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다. 우리 아버지의 아픈 가슴의 이야기이다. 이 마음이 에스겔을 통해서 똑같이 나타난다. 그 사랑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를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겠다.

카워드 : 회개, 거듭남, 요한복음, 물, 성령, 할례, 이혼, 니고데모, 에스겔, 예레미야, 호세아, 슈브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5절
  • 요한복음 8장 25절
  •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
  • 마태복음 5장 21절
  • 마태복음 5장 17절
  • 에스겔 36장 24절로 28절
  • 호세아 11장 7절로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