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두 가지 본성

by blogmaster posted Jan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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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요한일서 5장 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이, 율법이 무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죄인이 되어 있을 때는 그랬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분이 말씀하신 모든 말씀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그리고 무겁지 않은 정말로 가벼운 말씀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이 가르쳐 온 율법을 그대로 믿고 있다. 그래서 율법 없는 용서, 죄라는 것은 그냥 두리 뭉실하게 뜬구름 잡듯이 이야기하고 아니면 자기의 도덕적 표준에 의해서 죄를 정의하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죄는 이 정도다. 조금 더 양심적인 사람들은 더 높은 죄, 그래서 죄에 대한 각자가 생각하는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죄를 용서 받는다는 말도 다 다르다.

어떤 때는 자기 표준에 의해서 하나님을 만든다. 하나님은 이런 분일 것이다. 소위 영어로는 ‘man- made god’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 인본주의적인 사람이 만든 god 이것은 소문자이다. 대문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 인간이 만든 신앙, 인간이 만든 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 성경 속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내가 초기에 신앙을 할 때에 제 친구들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하나님을 보았냐?,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 그런 도전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내가 늘 내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 있다. 그것은 “이 성경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하’자 ‘나’자 ‘님’자가 얼마나 많이 계신지 모른다. 하나님을 보고 싶거든 성경에 들어가 봐라. 여기 ‘하’자 ‘나’자 ‘님’자가 수도 없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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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을 본 일이 없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성경 속에서 종이에 녹음 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그 분이 하시는 말씀 속에서 그 분이 어떤 성격에 어떤 품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내가 만든 하나님은 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 옷을 입고 성경에 들어가서 성경에 있는 말씀을 내 옷에다 붙여서 내 사상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나오는 사람, 또 하나의 해석의 방법은 자기 옷은 다 벗어버리고 맨 몸으로 성경에 들어가서 성경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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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분명히 내 책이 아니다. 내 말이 아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해석 하시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내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당신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어떻게 말씀 하시는지를 듣고 그 말씀을 입고 나오는 것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일서 5장 3절의 말씀도 그렇다. 그 앞에 요한일서 5장 1절 말씀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계속해서 2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여기 이 사랑의 관계가 형성이 되었을 때에 3절에 말씀하신 말씀대로 그냥 두리 뭉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사랑하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계명을 지킬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 말하면 엄마가 하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감정에 따라 믿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자기감정을 따라서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기감정을 따라서 믿는다. 믿어지는 시간이 있다. 기분이 좋고 인간적으로 현실적으로 무엇인가 잘 되어서 행복할 때 그런데 갑자기 불행이 닥치거나 병이 들거나 그럴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쉽게 못한다.

성경에서 욥이라는 사람을 보는데 욥도 같다. 그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자식도 없어지고 재산도 다 없어져서 병든 몸이 되었을 때에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욥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셔서 내가 이런 고생을 하게 하는가? 나를 뱄던 우리 어머니가 나를 뱃속에서부터 낙태를 해서 유산을 시켰더라면 내가 이런 고난을 보지 않았을 텐데. 우리 죄인들은 다 똑같다. 연약하다. 욥은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와 동일한 죄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이해한다. 연약한 죄인이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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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성경에 병이라고 표현했다. 그 병에 들리면 연약해지고 아프게 되는 것이다. 흔히 죄를 용서한다는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치료한다고 표현하셨다. 육체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고 마음과 우리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치료, 그것을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이란 말로 표현하셨다.

어쨌든 우리가 다시 이 본문의 말씀, 요한일서 5장 3절에 말씀으로 돌아와 보면 그러한 치유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용서를 통해서 경험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모든 계명, 모든 율법이 하나도 무거운 것이 아니다.

지난 시간에 몇 번 반복한 이야기 다시 반복하면,

죄도 누리고 죄도 즐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도 구원도 누리겠다는 아주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결론은 죄는 포기하지 않고 하늘나라도 가고 싶고 그래서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싫어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나쁘다고 그러면 나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내 마음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잠언에 말한 것처럼 진정한 친구는 정직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롯해서 죄를 사랑하고 좋아한다. 그래서 죄를 지적해 주는 하나님의 계명을, 율법을 싫어한다. 결과적으로 그 죄를 무시하면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한 채 넘어간다. 그러면 용서받지 못한 죄는 우리를 데리고 지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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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한다. 중요한 이야기이다. 하늘나라는 죄를 짓지 않아서 죄가 없어진 사람들이 가는 나라가 아니고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아서 죄가 없는 사람들이 가는 나라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외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본성 속에는 죄가 여전히 있는 연약한 죄인이다.

그것을 우리가 예수님이 오시는 날, 부활하는 아침에 새 몸으로 죄 없는 몸으로, 건강한 마음으로 건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다시 부활할 때까지는 우리 속에 죄가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8절“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똑같은 책 요한일서 1장 8절에 보시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우리 속에서 제거하시지 않는 이유는 그 죄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어떤 죄인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어디까지 용서하셨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것을 남겨 두셨다.

우리 안에 두 본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사랑의 본성과 또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고 죄를 사랑하는 본성이 우리 안에 상존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5절에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몸으로부터 구원 얻기를 원했다. 로마서 7장24절“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를 이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몸에서 누가 건져낼 것이냐?

그리고 로마서 8장 23절에서 답을 주고 계신다. 로마서 8장 23절에 분명히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우리 몸이, 죄가, 죄의 유전 형질이 없어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 사랑의 본성을 가진 유전자로 그런 몸으로 부활할 날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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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죄는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고 가셔서 용서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용서에 우리 자신을 믿음으로 맡긴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해 주신 그 보증 수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죄는 이미 용서되었다. 죄는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의 아침에 우리가 죄 없는 몸으로 부활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21절에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잘 붙들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키워드 : 십자가, 하나님, 사랑, 계명, 율법, 욥, 죄, 병, 용서, 치료, 본성, 부활 

성경구절

  • 요한일서 5장 3절
  • 요한일서 5장 1절
  • 요한일서 5장 18절
  • 요한일서 1장 8절
  • 로마서 7장 25절
  • 로마서 8장 23절
  • 빌립보서 3장 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