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당신의 용서의 어깨 위에 업으시고 돌아가시는 길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 믿음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주의해야 될 사실은 누가복음 15장 5, 6절 말씀 가운데에서 그 목자가 직접 양의 앞발 뒷발을 들어서 자기 어깨 위에 직접 메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때에 양이 하는 일은 맡기는 믿음이다. 이 맡기는 믿음은 소위 업혀지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업혀지는 상태에서 업혀지는 것 또한 양이 목자의 등에 올라가서 스스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양은 목자가 업겠다고 할 때 동의하고 목자가 앞발 뒷발을 잡아서 업도록 자신을 허락하는 것이고 실제로 업는 것은 목자가 업는 것이다.
흥미로운 단어가 로마서 7장 25절 가운데 나타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에 ‘마음’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쓰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누스’라는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는 “카르디아”라는 단어이다. 이것은 실제로 사람의 심장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 히브리말도 “심장”을 가리키는 “레브” 혹은 “레바브”라는 명사를 쓴다.
여기서는 ‘카르디아’ ‘심장’이 아니고 ‘누스’라는 단어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리말로 ‘이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이 ‘누스’라는 단어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혀와 같고, 비행기나 혹은 자동차로 말하면 운전대와 같다. 정신세계를 움직이는 아주 중요한 핸들이다. 그리스 철학에 있어서 누스는 대단히 중요한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가끔은 ‘영’ 히브리어로 ‘루아흐’라는 단어가 헬라어에 있어서 ‘누스’(‘마음’ ‘영’ 혹은 ‘숨’)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는 경우가 있다. 신약 성경에 그렇게 번역 된 예가 나온다. 이 ‘누스’는 본인의 이성적인 선택, 판단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흥미롭게도 로마서 가운데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로마서 1장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우리말은 앞에도 마음, 뒤에도 마음이지만 헬라어 말씀 원어를 보면 앞에 나오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 말은 ‘지식’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뒤편에 가면 다시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사” 그 때의 마음은 이성 ‘누스’라는 단어이다. 앞의 단어는 자체가 다르고 말이 다르다. 지식이라는 단어이다.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지식을 가리킨다.
문제는 뒤에 번역한 이 이성이 사람을 실제로 움직이는 운전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동일한 단어를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다시 사용한다.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때에 마음이라는 단어이다. 이성이다 누스, 같은 단어이다. 이 마음이라고 번역한 이 이성, 본래 말이 ‘이성’이다. 이 이성은 분명히 로마서 7장에서 다시 거듭남 다시 새롭게 창조된 이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이성을 새롭게 하므로” ‘새롭게 한다’는 말은 ‘창조’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이성을 가리킨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성적 존재로, 사물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할 때 그 사랑에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우리 마음을, 우리 몸을 맡길 수 있는 그런 판단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을 활용해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신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그 용서의 사실에 자신을 믿음으로 맡기는 일을 우리 자신에게 맡기셨다. 결코 예수님이 강제로 우리를 등에 업으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믿음이라는 말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잘못 오해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강제로 우리를 등에 업는 것처럼 오해 시키는 말들을 할 수 있다. 결코 아니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박살이 났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전기톱으로 차를 썰어서 그 속에 끼어 있는 몸이 다 부서진 사람을 꺼내어 이제 우리가 구급차에 실을 때에 거의 피를 많이 흘려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동의를 구한다. 병원에 가실 것인지 아니면 그냥 여기서 조용히 죽을 것인지 본인이 동의하는 여부에 따라서 병원에 옮길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둘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도 똑같은 것이다. 실제로 병원에 옮기는 것은 119 구급대원들이 옮기지만 본인이 이곳에서 조용히 얼마 남지 않은 생명 여기서 끝내겠다하면 그냥 끝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 마음을 누구에게 맡기느냐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믿음은 맡기는 것이다, 업히는 것이다. 실제로 업는 것, 그것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성경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만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고 있다. 유다서 1장 3절 우리 번역은 “믿음의 도”라고 번역하였는데 ‘의’ ‘도’는 없다. 그냥 믿음이다. 헬라어로 ‘피스티스’ 라는 단어로 ‘믿음’이다. 그냥 주셨다. ‘단번에 주신 믿음.’
또 베드로후서 1장 1절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받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똑같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7장 31절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도 심판할 수 있다는 명백한 믿음의 증거를 주셨다. 그러나 헬라어 본래 말은 ‘피스티스’이다. ‘믿음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 믿음이라는 것 자체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맡기는 것은, 업히는 것은 내가 업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앞다리 뒷다리를 잡도록 우리가 동의하는 선택 하에서 우리의 다리를 잡아서 주님이 업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주인이시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로 하신 말씀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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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누가복음 15장 5,6절
- 로마서 7장 25절
- 로마서 1장 28절
- 로마서 12장
- 로마서 12장 2절
- 유다서 1장 3절
- 베드로후서 1장 1절
- 사도행전 17장 31절
- 히브리서 12장 2절
- 요한복음 15장
- 요한복음 15장 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