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용서받고 거듭난 죄인

by blog posted Jan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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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다‘의 의미

한 발 더 나아가 보자, 거듭나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인 모세 이야기, 광야의 뱀 이야기 정말 놀라운 이야기다. 민수기 21장 8절 말씀을 보면, 장대 위에, 나무 위에 불타는 뱀을 매달아라. 그리고 그를 쳐다보는 자마다 살리라고 말씀한다. 

‘쳐다본다’고 기록된 민수기 21장 8, 9절의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4, 15절에 예수님에 의해서 그대로 나타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쳐다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광야의 뱀을 쳐다본 자들이 일시적인 목숨을 찾았다면, 저주받은 뱀처럼 저주받은 채로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중요한 모형이다.

여기서 쳐다본다는 말이 나타난다. 히브리어로 ‘나바트’라는 동사이다. 이 동사가 흥미롭게도 스가랴 12장 10절에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실 텐데 그 성령을 받은 자들이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자기들이 찌른, 자기들이 죽인 나를 쳐다보고. 똑같은 말이다. ‘쳐다보고’이다. 히브리어로 ‘나바트’. 나를 바라보고 통곡할 것이라.

스가랴 12장 10절을 요한이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사건에 그대로 인용을 한다.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언하는 예언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요한복음 19장 37절 말씀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쳐다보다는 동일한 동사가 사용된 ‘나바트’라는 동사가 사용된 이 말씀이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것이다.

흔히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쳐다봄’이라고, ‘바라봄’이라고 설명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민수기 21장에 나타난 이 바라봄은 정말 죽음의 고통 속에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으로 쳐다보는, 완전히 죽게 된 자기를 맡기는 바라봄이었다. 다른 길이 없다. 죽을 수밖에 없다. 절망이다. 

그 가운데서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말씀에 의지해서 쳐다본 것뿐이다. 어쩌면 믿음이 없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도 살고 싶은 마음에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반역한 마음속에서도 살고 싶은 마음에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여러분, 그것과 관계없다. 자신의 어떤 형편과도 관계없이 그 뱀을 쳐다볼 때에 그들은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중요한 상징이요 모형이다. 

저주받은 뱀처럼 저주받은 채로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중요한 모형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말씀에 의지해서 쳐다본 것뿐이다. 어쩌면 믿음이 없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도 살고 싶은 마음에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반역한 마음속에서도 살고 싶은 마음에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어떤 형편과도 관계없이 그 뱀을 쳐다볼 때에 그들은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본 강도

예수님 옆에서 죽었던 구원 얻은 강도 역시 같았다. 처음에는 예수님 옆에서 죽은 또 다른 친구와 같이 예수님을 원망하고 조롱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못 박히기 위해 끌려가던 시간, 못 박히던 그 시간, 고통을 당하던 그 잠시 시간 동안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했고 쳐다보았을 때 그분 속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다. 

기억하라! 오늘 많은 사람들이 무얼 쳐다보고 사느냐? TV를 쳐다보고, 세상의 쾌락을 쳐다보고, 자신의 돈과 행복을 쳐다보고 그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은 그렇다. 자신의 행복이, 자신의 이 안락한 생활이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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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정말로 처참하게 매 맞고 찢겨져 돌아가시는 가시관 쓰신 예수그리스도를 쳐다보는 순간 성령께서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도대체 왜 예수님이 저렇게 돌아가셔야 하는가? 생각하게 하고 성령의 특별한 감동하심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사람들처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내가, 내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에,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가셨다는 그 사랑에 통곡하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다. 분명히 스가랴 12장 10절에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이 부어 지실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쩌면 십자가 멀리에서, 요한 같은 사람은 바로 십자가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고 안타깝게 눈물 흘렸을 것이다. 자신의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옆에 함께 죽었던 강도는 바로 자신의 죄를 묻고 용서하시고 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이다. 성령의 특별한 깨닫게 하시는 감동하심 때문이었다. 

십자가 옆에 함께 죽었던 강도는 바로 자신의 죄를 묻고 용서하시고 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이다. 성령의 특별한 깨닫게 하시는 감동하심 때문이었다.

사람은 스스로 거듭날 수 없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 밑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 누구도 그 죽으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단순히 그분이 죄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돌아가셨다. 그저 희생의 아름다운 모본으로, 사랑의 아름다운 모본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멀리서 주님을 바라 본 막달라 마리아

아니다,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다. 더러운 여인이어서 감히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멀리서 주님을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이 통곡하고 울었던 여인이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의 죄를 십자가로 가지고 올라가셔서 자신 대신 돌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 여인은 울고 또 울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에 마지막까지 앉아서 울었던 여인이다. 안식 후 첫날에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그 날 예수님의 시신을 다시 제대로 싸드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뛰어갔던 여인, 세상에서 가장 죄 많았던 여인,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많이, 다 용서받은 이 여인만이 십자가의 우리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았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예수님 발밑에서 한없이 울었던 이 여인. 용서받은 이 여인, 가장 죄 많았던 여인 그러나 가장 많이 용서받았던 여인, 아니 인생을 통째로 용서받았던 이 여인.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많이 용서받은 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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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돌아가신 뒤에 그 몸에 향유를 부을 수 없었던 그 더러운 여인. 그는 감히 주님을 만질 수 없었기에 몰래 예수님 발밑에 들어와서 한없이 그 용서의 사랑에 울었고, 감히 자기가 주님의 몸을 만질 수 있을까 해서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향유를 부었던 그 아름다운 용서받은 여인의 사랑, 그 사랑을 주님은 받아주셨고 그 더러운 여인에게 몸을 맡기셨다. 

그리고 그 여인을 향해 네가 나를 많이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다 용서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끝내는 누가복음 7장 50절에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구원을 선언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암에서, 질병에서 구원하였으니’가 아니라 ‘너를 영원한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였으니 내가 너 대신 영원한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그래서 너는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 예수님은 베드로를 기다리신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기다리신 것도 아니었다. 무덤을 향해 뛰어왔던 베드로를 만나시지 않았다. 요한을 만나시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먼저 하늘 아버지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경배하려할 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말씀하셨다. 그날 아침 부활하신 그 동산에 찬 이슬을, 새벽이슬을 맞으시면서 예수님은 그 무덤가를 서성거리고 계셨다. 

바로 그 여인, 자기가 없어진 사실을 보면 자지러져 죽을 그 여인을 뒤로하고 가실 수 없어서 아버지 하나님을 뵙기 전에 그는 먼저 용서받은 그 여인, 자기의 피를 다 받아준 그 여인, 사랑하는 그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 여인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시던 그 시간에 함께 죽었다. “주님, 정녕 이것이 내 죄의 대가였다면 차라리 내려오시옵소서. 내가 올라가겠나이다.” 몸부림치며 울던 그 여인은 주님께서 머리를 숙이시던 시간에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 거듭남은 바로 용서받은 죄인의 몫이었다.

키워드 : 죄인, 용서, 거듭남, 모세, 나무, 뱀, 십자가, 예수, 영생, 마리아, 향유 

성경구절

  • 민수기 21장 8절
  • 요한복음 3장 14~15절
  • 스가랴 12장 10절
  • 요한복음 19장
  • 민수기 21장
  • 누가복음 7장 47절
  •  
  • 누가복음 7장 5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