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이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가 그 생명을 누릴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 보다 영원히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만약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이 있다면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반드시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선택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찾지 않고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길 원한다.
‘영생’이 무엇인가? 영생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고 그에게 자신을 맡기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 되는 행복, 그 행복이 영원한 것을 영생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부부간에 살면서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이 시간이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한 사랑의 행복이 계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 ‘사랑하셨다’는 말이 이 성경을 기록했던 구약의 이스라엘 말로는 ‘아헤브’라는 동사이며 ‘바친다’는 뜻이다. 사랑은 말이 아니고 바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소리가 아니고 그것은 행동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한다. 여기 분명히 자신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들은 자기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주시는 행동을 ‘사랑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쉽지 않은 것,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은 자기 아들을, 더구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주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가장 큰 사랑은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내어 주는 것이다. 자기를 주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단번에 주시고 그리고 영원히 돌이키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을 받은 죄인이, 그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공식화 한다면 ‘영생은 사랑 더하기 믿음’이다. ‘믿음‘은 본래의 말이 ‘맡긴다‘는 뜻이다. ’맡김‘이라고 읽는 것이 훨씬 더 본래의 뜻에 가깝다. 머리로 인정하는 그런 믿음뿐만 아니라 자신을 맡기는 믿음, 그것이 성경이 본래 말하고 있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그 사랑에 자신을 믿음으로 맡길 때 영원한 생명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2장 24절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생명, 남편이 아내에게 자기를 주고 아내가 자신을 남편에게 맡겼을 때 아들이나 딸이라는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셨을 때, 그 아들의 사랑에 맡기는 일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생겨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영생의 공식’이다. 참으로 자신을 다 주신 사랑에 감동 되어서 자신을 그 사랑에 완전히 맡길 때에,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한없이, 무한히 행복한 상태를 생명 혹은 영생이라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영생‘
성경에 나타나는 ‘단번에’ 혹은 ‘일시에’라는 단어들은 일회성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영원성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기를 단번에 준다. 그리고 영원히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원한 사랑을 표현할 때 ‘단번에’라는 말로도 표현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에 자기를 주셔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그 아버지는 영원히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것을 성경 유다서 1장 3절에도 똑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것은 ‘한 번 주시고 다시 가져가지 않는, 영원히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라는 뜻이다.
또 히브리서 9장 11절, 12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그가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말은 본래 말뜻이 영원히 우리를 위해서 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주셨다가 도로 가져가시는 그래서 두 번째 주시는, 세 번째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구약에도 그런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 성경 말라기 3장 6절에 보면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한번 주신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랑이 변할 때 우리는 멸망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생의 공식
‘영생의 공식’은 한 번 주시고 영원히 주시는 사랑에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한 번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면 영원히 아빠이고 영원히 엄마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우리의 영원한 아들이고 영원한 딸이다. 일회성이 아닌 영원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아주 중요한 공식이다. 이 공식은 꼭 기억하시면 좋겠다. 영생을 만드는 공식은 사랑 더하기 믿음이다.
이 단순한 공식을 우리가 계속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공식을 이해 못하면 사실은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공식이다. 그 공식을 대입하면 문제가 풀린다.
어떤 목사님이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낱말풀이다’ 하신 분이 계신다. 그분이 신학을 하셔서 신학에 깊은 조예를 가지신 분인데 그 어른의 말씀대로 분명히 성경은 오해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앞으로 우리가 하나씩 살펴보겠지만, 성경에 나타난 단어들의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성경이 말씀하신 말씀이 아니고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그 말씀하신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고 축복이다. 그래서 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간절한 기도 없이는 잘못하면 오해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늘 성경을 펴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있는 죄들을 버리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마음을, 양심을 씻고 하나님께서 본래의 말씀하셨던 사랑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성경을 펴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계속해서 이 말씀을 찾는 동안에 그렇게 함께 하시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 돌아가 보자. 영원한 생명! 간단한 한 단어이지만 이 단어 속에 성경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성경의 헌장’이라고 부른다. 성경을 압축해 놓은 말씀이다.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는 이 성경 속에 있는 모든 말씀이다. 그 모든 말씀이 이 한 성경 절 안에 다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이는’이라는 단어는 ‘이유는’이라는 말의 줄인 말이다. 이유는 “저를 믿는 자마다”, 빈부귀천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말로 바꾸어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할 때에는 본인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자기 죄를 책임지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용서의 사랑이 우리를 영원한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지신다는 사실을 이 성경 절은 우리에게 선언하고 계신다.
이 영생에 다 함께 참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창세기 2장 24절
- 유다서 1장 3절
- 히브리서 9장 11절,12절
- 말라기 3장 6절
- 고린도후서 5장 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