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구원의 공식 내용

by blogmaster posted Nov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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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구원의 공식 내용

아래에 기술하는 요 3:1~16의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구원을 받는 것인지의 요지를 보고 구원의 공식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니고데모는 유대 민족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받는 지위에 있었다. 그는 높은 교육을 받았고 재능이 탁월했으며 또한 국가 의회의 명예 있는 의원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예수의 가르침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부자이자 학식이 있고 존경받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이 미천한 나사렛 사람에게 마음이 끌렸다.

구주의 입에서 나온 교훈에 깊이 감동한 그는 이 놀라운 진리를 더욱 배우고 싶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 정결을 위해 권위 있는 일을 행하신 것은 제사장들과 관리들의 격렬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이 낯선 사람의 능력을 두려워했다. 이름도 없는 한 갈릴리 사람의 이러한 대담함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의 일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여기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분을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한 자들도 다소 있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죄를 책망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을 상기했다. 유대인이 이교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견책을 완고하게 거절한 결과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예수를 해칠 음모를 세움으로 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선조들과 같은 길을 따르고 있으며, 이것이 국가에 새로운 재난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두려워했다. 니고데모는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산헤드린 회의에서 예수에 대해 어떠한 방침을 취할지 토의했을 때, 니고데모는 신중함과 자제를 권고했다. 그는 만일 예수께서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것이라면 그 경고를 거절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제사장들은 감히 이 권고를 무시할 수 없어 당분간은 구주에 대해 공공연한 수단을 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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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말씀을 들은 후 니고데모는 메시아와 관련된 예언을 열심히 연구했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이분이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던 분이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그는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대단히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을 때 그는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하늘에서 온 능력의 놀라운 현상을 보았다. 그는 구주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얼굴 표정을 보았으며 찬양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니고데모는 예수와의 면담을 매우 원했지만, 공공연히 예수를 만나는 것을 망설였다. 유대인의 관리가 아직 이름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 교사와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면목없는 일이었다. 예수를 찾아갔다는 사실이 만일 산헤드린에 알려지면 그들의 조소와 비난을 초래할 것다. 그는 자신이 공공연히 찾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따라서 할 것이라는 이유를 구실 삼아 조용히 예수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특별한 조사를 통해 감람산에 물러나 계시는 구주의 거처를 알게 되자, 그는 온 동네가 잠들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 예수를 찾아갔다.

그리스도 앞에 나오자 니고데모는 묘하게 주눅이 들었으나 태연함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이를 애써 감추려 했다. 그는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행할 수 없습니다.”(요 3:2) 그는 교사 그리스도의 비범한 재능에 대해, 또한 기적을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꺼냄으로, 면담을 순조롭게 시작하려 했다. 그의 말에는 신뢰심을 나타냄과 동시에 신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말에는 불신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교사로서 인정했다.

이 인사를 인정하는 대신 예수께서는 상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읽고 계시는 듯 니고데모에게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셨다. 무한한 지혜를 갖고 계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눈앞에 진리를 찾고 있는 한 인간을 보셨다. 주께서는 이 방문의 목적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께서는 상대의 마음에 이미 싹트고 있는 확신을 깊게 하려고 곧바로 요점을 다루며 엄숙하게 그러나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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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주와 토론하려고 왔지만, 예수께서는 진리의 근본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하셨다. 주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적인 지식보다 영적인 다시 태어남이다. 당신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새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당신은 하늘의 사물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위로부터 오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변화가 일어나 모든 것이 새로워질 때까지는 나의 권위나 나의 사명에 대해 나와 토론해도, 그 결과는 그대의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니고데모는 침례 요한이 회개와 침례에 대해 설교하고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는 분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들었다. 그 자신도, 유대인들 사이에 영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이 완고함과 세속적 야심에 크게 지배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메시아가 오실 때, 여러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침례 요한의 예리한 메시지에도 그의 마음은 죄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자신의 선행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자선의 행위와 성전 봉사를 유지하는 일에 아낌없는 헌금을 하여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나 순결하기 때문에 그의 현재의 상태로는 볼 수 없다는 사고(思考)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새로 태어난다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니고데모에게 전혀 낯선 말은 아니었다. 이교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을 곧잘 막 태어난 아기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난 덕분에 하나님 나라에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주의 말씀에 놀란 것이다. 그는 이 말씀이 바로 자신에게 적용되자 초조해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긍지가 진리를 찾는 자로서의 순수한 바람과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관원인 그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에게 이런 말투를 사용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놀라서 침착성을 잃은 그는 빈정거리는 투로 그리스도께 대답했다. “사람이 이미 나이가 많아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요 3:4) 예리한 진리가 양심에 호소하자 그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자연 그대로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그 안에는 영적 사물에 반응하는 어떤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영적 사물은 영으로 식별되기 때문이다.(고전 2:14 참조)

그러나 구주께서는 논쟁을 논쟁으로 응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지하고 조용한 위엄을 가지고 한쪽 손을 올려 한층 강한 보증으로 진리를 강조하셨다.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니고데모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물의 침례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침례 요한이 예언한 분 앞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난다.”(요 3:6) 마음은 태어나면서 악하다. “누가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욥 14:4) 인간의 어떤 발명품도, 죄를 범하고 있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죄의 본성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 “마음에서는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말, 그리고 비방이 나온다.”(롬 8:7; 마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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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가 깨끗해지려면 마음의 샘이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려 하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적인 종교, 경건의 모양만을 지니고 있는 자는 안전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옛것을 수정하거나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와 죄에 대해 죽고, 완전히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변화는 성령의 효과적인 작용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니고데모가 아직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바람을 예로 들어 그 의미를 설명하셨다. “바람은 제 마음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요 3:8)

바람은 작은 나뭇가지에서 소리를 내고 잎이나 화초가 서로 스치는 소리를 내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아무도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마음에 작용하는 성령의 역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바람의 움직임처럼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 대해 정확한 일시와 장소를 말하거나 회심하게 된 상황과 자취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믿음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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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그 마음에 작용한다. 조금씩, 아마도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영혼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감동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감동은 그리스도를 명상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살아 있는 설교자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성령께서 더 직접적으로 호소할 때, 그 영혼은 기꺼이 예수께 굴복합니다. 많은 사람은 이를 갑작스러운 회심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랫동안 그 사람에게 호소하신 결과, 곧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작용의 결과이다.

바람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으로 생기는 결과는 보거나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대한 성령의 작용은, 그 구원의 능력을 느낀 사람의 모든 행위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음을 지배하실 때 그것은 삶을 변화시킨다. 죄의 생각은 사라지고 나쁜 행위를 포기하게 되며 사랑과 겸손과 평안이 분노와 질투와 다툼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얼굴은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어느 누구도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손을 보거나 하늘 궁전에서 내리비추는 빛을 보지 못한다. 축복은 믿음을 통해 영혼이 하나님께 굴복할 때에 주어진다. 그때,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유한한 인간의 두뇌로 속죄 사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속죄의 깊은 의미는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

하지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자는 그것이 하늘에서 온 현실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속죄의 시작을 이 세상에서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영원한 시대까지 미친다.

예수께서 이야기하고 계시는 동안 진리의 희미한 섬광이 이 관원의 마음을 관통했다.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복종시키는 성령의 감화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도 그는 구주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날 필요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달성되는 방법에 감동받았다. 그는 의아해 하면서 말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요 3:9)

예수께서는 물으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인데도 이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느냐?”(요 3:10) 분명 백성의 종교적인 교육이 맡겨져 있는 자가 이렇게 중요한 진리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 되었다. 예수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진리의 분명한 말씀에 초조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지한 자기 자신에 대해 실로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엄숙한 위엄을 가지고 말씀하셨으며 얼굴에도, 목소리의 어조에도 열렬한 사랑이 나타나 있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자신의 면목없는 입장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당신의 사명이 이 세상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 왕국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하시자 상대는 곤혹스러워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덧붙이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 말했는데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데, 내가 너희에게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너희가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만일 니고데모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은혜를 예시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의 영광스러운 하늘 왕국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지상에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늘에서의 그분의 사업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쫓아내신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구주 앞에서 도망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성전의 거룩한 봉사에 참여하는 데 적합한 자가 아님을 입증했다. 그들은 성결의 형식을 유지하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마음의 성결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대해서는 까다로웠지만, 끊임없이 그 정신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바로 그 변화, 곧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죄로부터의 정결, 그리고 지식과 성결의 쇄신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해 이스라엘의 눈이 먼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사야는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더러워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의로운 행동도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사 64:6) 다윗은 기도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한킹) 또한 에스겔을 통해 약속을 주셨다. “너희 안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넣어 주겠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그 대신 살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너희 안에 내 영을 두어 내 법을 잘 지키도록 하겠다.”(겔 36:2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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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이들 성경 구절을 흐려진 마음으로 읽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을 외면적인 생활에 적용시켜 아무리 엄격하게 문자 그대로 지켜도, 아무도 하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의 생활은 올바르고 존경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앞에 나오자 그는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이 성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고데모는 점점 그리스도께 이끌렸다. 구주께서 다시 태어남에 대해 설명하셨을 때 그는 이 변화가 자신 안에 이루어지기를 열망했다.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입 밖에 내지 않는 이 질문에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요 3:14, 15)

여기에 니고데모가 잘 알고 있는 근거가 있었다. 들려진 뱀의 상징을 통해 그는 구주의 사명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린 상처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서 회중 한가운데 높이 매달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뱀을 우러러보는 자는 모두 살 수 있다는 소식이 온 진영에 전해졌다. 사람들은 뱀 자체에는 그들을 도울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멸망시키는 뱀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형상이 그들의 치유를 위해 들어 올려진 것처럼, “죄 있는 사람의 모양”이 되신 분이 그들의 구속주가 되시는 것이었다.(롬 8:3)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의식 자체에 그들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구리 뱀에게 가치가 없었던 것처럼,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의식 자체에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르치려 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구주께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든,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 이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바라봐야 사는 것이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바라보는 일을 늦출 수도 있었다. 이런 구리로 된 상징에 무슨 효력이 있을까 하고 의심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과학적인 설명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설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다. 바라보기를 거절하는 것은 멸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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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나 토론으로는 영혼에 빛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바라봄으로 살아야 한다. 니고데모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간직하고 돌아갔다. 그는 이론적 토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에 생명을 받기 위해 새로운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했다. 성령의 인도에 자신을 맡겼을 때, 그는 하늘의 왕국을 보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들려진 뱀을 통해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것과 같은 진리를 배워야 할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격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을 듣고, 예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을 듣고 외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요 3:9)

니고데모처럼, 우리도 죄인의 두목과 동일한 방법으로 자진하여 생명에 들어가야 한다.(딤전 1:15/현인 참조)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우리가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구주가 아니다. 믿음 자체에는 효력이 없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꼭 붙잡는 손, 곧 죄에 대한 치료제인 그분의 공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회개하는 일조차 할 수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예수님을 자기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5:31/현인) 용서가 그러한 것처럼 회개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이르는 것이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1절로 16절
  • 욥기 14장 4절
  • 로마서 8장 7절
  • 마태복음 15장 19절
  • 이사야 64장 6절
  • 시편 51장 10절
  • 에스겔 36장 26절로 27절
  • 로마서 8장 3절
  • 디모데전서 1장 15절
  • 사도행전 4장 12절
  • 사도행전 5장 3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