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만 보이더라

by blogstar posted Nov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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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벗겨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영성훈련’을 어떤 교육이라고 생각하는데 교육이 아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목사님들이 앞에 나와서 설교하면 뭘 깨닫고 알 수 있는 것 같지만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는 말을 깨닫고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정보를 얻는 것 정도이다. 지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죄가 없어져야 볼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자기를 보는 사람이다. 자기의 본 모습, 쉽게 말하면 자기 속에 죄 밖에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사람을 복 있다고 그랬다.

자기 본 모습, 그것은 설명을 해 주어서 아는 게 아니다. 죄를 벗겨내면 나중에는 알맹이, 자기 몸만 남는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누드 상태가 자기 모습인 것이다.

죄를 벗겨내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를 볼 수 없고 예수님을 볼 수 없다. 예수만 보이더라. 이 ‘만’자가 왜 붙었는지 여러분 보셔야 된다. 왜인가? 여러분들 아픈 사람은 뭐만 보이는가? 의사만 또 병원만 약국만 보인다.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만 보인다.

그런데 ‘예수만 보이더라’는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한다. 이 예수님만 보이는 사람은 죄인인 사람이다. 죄인만이 예수님만을 볼 수 있다. 죄인 외는 안 보인다. 그러니까 죄인이 아닌 사람은 성경에 대한 지식들과 세상에 많은 정보들, 그런 것들이 보인다. 또 그런 것 찾으려고 그런다. 예수만 보이는 것은 ‘나 같이 불쌍한 죄인이 없다.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용서해 줄 것인가? 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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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정보, 예수님에 대한 지식만 구한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봐야 되고, 예수님을 알아야 된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말 그대로이다. 신약성경 헬라어로 ‘예수스’, 구약성경은 ‘예수와’ 즉 ‘구원자’이다.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자이다. 죄인 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예수님을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왜 그런가?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이 예수님과 나 사이를 가리고 있다.

아주 비참한, 그야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참한 내 모습의 죄인이 아닌 이상 절대로 예수님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침묵을 하는 이유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교제만을 위해서, 하나님과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이 예수님과의 허니문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과 죄인 사이에 허니문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이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죄인과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러브 스토리이다.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다. 예수님이 피를 쏟아서, 자기 목숨을 다 바치신 사랑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내 아내를, 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어떤 욕심을 채우기를 원하고, 밥 잘해주고, 나한테 따뜻하게 해 주고... 그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아내를 그냥 다 뺏어서 아내를 다 삼켜버리는 것이다. 아내도 남편이 돈 많이 벌어주고, 잘해 주고, 뭐 선물 사 주고 등...그런 것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기 욕심 차리는 것이다. 왜 우리는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가? 왜?..

영성훈련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왜 그런가?

내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똑 같다. 아닌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아니라면 죄송하지만 다 그건 거짓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똑 같다.

그래서 영성훈련을 통해서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고 정말로 1:1로 내가 죄인으로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가 침묵하고 기도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된다. 왜, 잘 안되는가 하면 사람이 40일이 아니라 정말 그만두고 일주일만이라도 예수님과 정말로 집중적으로 더 깊은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게 꼭 파도타기처럼 예수님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세상으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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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그걸 반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가슴속에 깊이, 바다 속에 내려가듯이 내려가는 경험을 못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 맛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그런다. 우리는 똑같다. 피아노 치는 사람들, 바이올린 하는 사람들이 하루 10시간씩 연습한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그렇게 쉽게 연주자가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똑같이 얘기하는 것은 하루만 쉬고, 하다못해 10시간 하는 것 오늘 바빠서 3시간만 하면 당장 손놀림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그렇다. 깊이 숙지해야 한다.

누가복음 5:26절“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눅 5:26)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다. 죄밖에 평생 지은 것이 없는 이 불쌍한 죄인을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그를 잡아 일으키시고 치료하셨다. 그때에 ‘놀라’ 라는 말이 나온다.

헬라어는 ‘엑스타시스’(ekstasis) 이다. 신약성경에는 몇 번 안 나온다. 이 말이 영어에 ‘엑시터시’(ecstasy) 가 되고 한국말로는 ‘황홀’이다. 해피(happy)가 아니다. 결혼하면 행복하다. 그런데 ‘엑스타시스’는 황홀, 너무 황홀해서 구름위에 있는 것 같고 너무 너무 행복하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황홀한 것이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이 ‘엑시터시’는 예수님 만났을 때인데, 어떤 예수님 만났을 때의 현상인가?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내가 너를 용서했다는 증거로 일어나 걸어라. 왜? 네가 병든 이유가 뭐냐? 죄 때문이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 하며 일어난 현상이다.

그 당시 바리세인들이 옆에서 ‘어떻게 저 인간이 자기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으로서 하나님처럼 죄를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했다. 예수님께서 ’내가 증거를 보이겠다. 일어나서 걸어가라. 네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증거 하셨다. 이 사람이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간다. 그때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황홀하였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시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의 소원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를 용서하신, 우리를 받아주신 주님을 만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고 기도한다.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품에 안으시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신 아버지가 아닌가? 우리 죄를 보여주시고 우리 죄를 가슴에 묻고 가신, 주님의 그 아픈 가슴도, 찢어진 가슴도 보여 주시고, 아버지 품에 우리를 끌어 안으셔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사람으로, 우리를 다시 만들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3절
  • 누가복음 5장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