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거듭남은 본성과 품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by blog posted Nov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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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상태 곧 거듭난 상태를 성경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려면 타락 전의 인간의 본성과 타락 후의 본성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거듭남은 성령께서 타락 전의 본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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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26절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종자, 태를 가지고 나왔다. 즉 하나님의 씨로, 하나님의 유전자로 이 땅에 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겉으로 나타난 외모나 외형만 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본성’까지 그대로 닮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여기서 어떤 종자, 씨가 밖으로 나타난 모습을 형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씨가 밖으로 싹이 나서 잎이 나오고, 줄기가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과정의 전체적인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이 무엇일까? 전도서 3장 19절을 보면 사람과 동물이 동일한 호흡과 생기로 지어졌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인간이나 동물은 재료가 같다고 말하는 것인데,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모형, 모델이 다르다는 것이다. 형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지만 동물을 만드실 때는 동물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전도서 3장 19절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  - 재료(=흙과 생기)가 같다.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 - 본따 만든 모형이 다르다.
인간은 - 하나님의 형상이고
동물은 - 본래부터 동물의 형상이다.

동물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고 사람에게만 있다. 
동물에게는 없는, 사람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요즘 유전학자들도 동물과 인간의 유전자가 거의 같고 조금만 다르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다르다고 하는 것인지 한번 살펴보았으면 한다.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만 가지고 있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동물도 지성이 있다. 아이큐가 있다. 감성도 있다. 동물도 울며 슬퍼할 줄 안다. 의지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있다.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주어진 고유한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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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본능 - 시편 42편 1절, 갈라디아서 5장 6절

신앙본능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자녀에게 베푸시는 본능적 사랑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본능적 반응을 말한다. 신앙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맡긴다'인데, 갈라디아서 5장 6절을 보면 이 '맡기는 일'인 ‘믿음’은 사랑이 역사할 때에, 사랑이 주어졌을 때에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휘발유가 자동차 속에 들어가면 자동차가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맡기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처녀가 총각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면 자기 인생을 그 총각에게 맡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속에 들어올 때 사람이 그 사랑에 감동되어 자동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 것이다. 이 신앙본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움직여서 만들어 내는 본능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셔서 생겨나는 본능이 아닌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사람 속에 한없이 부어주실 때, 사람이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그 하나님의 사랑에 자기를 맡기게 되는 그런 본능인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본능적으로 되어 진다'라고 하는 이 이야기를 풀어서 말하자면, 태초에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을 인간 아들딸에게 한없이 부어주신 일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아들딸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자신을 그 사랑에 다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다 맡기는 것이 본능적으로 되어지는 그런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평소에 이 '신앙본능'이라는 말이 나오면 오해를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에 덧붙여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동물에게는 신앙본능이라는 것이 없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유트브에 들어가 보면 개가 기도하는 동영상이 있는데 그것도 신앙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개나 고양이가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인이 훈련을 시킨 결과로 흉내를 내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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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서 자기를 전적으로 다 맡기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다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통째로 다 받아서 그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본능, 그것을 ‘신앙본능’이라고 하는데 동물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신앙본능을 넣어 주셨다'는 말씀은 먼저 당신을 아담에게 다 쏟아 부으셨다는 뜻이다. 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을 품에 안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처럼.  

시편 42편 1절“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는 말씀처럼 한 심령이 실제로 그 하나님을 갈급해하며 찾을 때에는 죄를 지었든지, 나쁜 짓을 했든지, 상처를 받았든지 상관없다. 그냥 엎드리면서 입에서 자동적으로 ‘아버지!’라고 나오기도 한다. 어떨 때는 다른 이야기는 필요 없이 ‘아버지!’라는 말만 반복하기도 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가? 그렇다. 그분은 다 알고 계신다(마 6:6).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읽고 계신다(시 139:1~5). 우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 다 알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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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8절에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남편이나 아내에게 혹은 친구에게조차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그러니 기도할 때 장황하게 서론, 본론, 결론, 그렇게 다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냥 ‘아버지!’ 하면서 ‘다 아시지요’라고만 해도 되는 것이다. 너무 기가 막히는 일이 생기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설명을 안 드린다고 모르시겠는가? 아니다. 이미 다 보고 계신다. 심지어는 내 마음이나 내 죄를 모르고 있는 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다 알고 계신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고 성경은 말한다(계 3:17).  

누가복음 23장 34절“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나 자신은 나를 모르지만 아버지는 아신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의 그 사랑이 느껴질 때 아버지께 자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맡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본능’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받지 않고 텔레비전의 사랑, 인터넷의 사랑, 돈의 사랑, 명예의 사랑, 스포츠의 사랑, 식욕의 사랑, 세상의 사랑 등등 하나님의 사랑 외의 사랑을 훨씬 더 많이 받아서 믿음이 거의 없거나 매우 적은 상태이다.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또는 걱정, 근심, 고민, 염려가 있을 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해 버리기 때문에 믿음 곧 신앙의 본능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인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이 신앙본능 곧 믿음을 회복해야 되지 않겠는가?

 2. 사랑의 법 - 로마서 2장 14~15절

본능적 사랑의 율법이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었다.
사랑의 율법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것이다.
로마서 2장 14~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 속에, 곧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법을 기록해 놓으셨다.

로마서 2장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여기서 '행위'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르곤’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열매'나 '결과'라고 읽어도 틀리지 않다. 그렇게 다시 읽어보면, '마음에 새긴 율법이 만들어낸 결과를 나타내느니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14절에는 ‘본성’이라는 말도 사용하고 ‘양심’이라는 말도 사용했는데 둘 다 같은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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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킹흠정)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신의 품성’ 곧 ‘하나님의 본성’으로, 사랑의 법으로 회복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말의 뜻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로 ‘양심’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로마서 2장 14절 맨 앞에 나오는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돌판 십계명 율법을 말한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없다. 

교회에 오면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율법을 배운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짓을 하면 가슴이 철렁하고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는 것은 양심이 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안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보다 훨씬 더 양심적인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법 곧 율법을 사람의 마음에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 그 두 마음이 각각 기둥이 되어 모든 율법이 그 두 기둥에 걸려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고, 또 내가 아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아담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능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본능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 아담의 마음속에 도둑질 하지 말라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기록하실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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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들어 온 다음에 도둑질도 생기고 거짓말도 생기고 살인도 생겼지만 그 전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도둑질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거짓말이 뭔지 몰랐다.  그때는 도둑질이 있어야 하지 말라고 할 것인데, 없는 상황에서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남의 것 가져오지 말라는 말만이 아니다. 그 말의 본래 뜻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절대로 안 가져온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갖다 준다. 율법의 본질은 본능적인 사랑이다.

즉,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도둑질 하지 않은 것으로 율법을 다 지킨 것이 아니다.  도둑질 하지 않은 것은 그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킨 것뿐이다.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내 것을 본능적 사랑으로 다 갖다 주어야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다 지킨 것이다.  그 본성이 아담의 마음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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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사랑하는 아내를 정말로 너무 예뻐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소위 정욕이나 욕심에 의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다. 안 주고 못 견디는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아내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갖다 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 사랑의 본능이 아담의 마음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다.

부부간에도 때때로 화가 나고 미워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니까,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속이 뒤집어 진다.  부부간에  서로가  때론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있다. 그때 죽은 송장이 발딱 일어난다. 아주 자동이다. 그래도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도 사랑해야 된다.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정말로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자식이 와서 부모 속을 썩여도 용서하고 사랑하는가?  그렇다. 자식에 한해서는 자동으로 
사랑한다. 

그 사랑, 곧 자식은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이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그 본능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 다시 만들어져야 된다. 창조되어야 된다. 우리가 계속 공부하겠지만 그것이 ‘거듭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사랑한다’는 표현은 다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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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족하게 될 때 그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거짓말이다. 거듭나지 않고는 이타적인 사랑, 본능적인 그 사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본능적인 사랑, 다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랑의 법이, 그것이 곧 우리 본성의 법이 된 상태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마음에 새긴 율법,  본능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법이 된다. 

참 이것이 위대한 진리이다. 그 사랑이 우리 본성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바다의 게는 옆으로 걷는 것이 법칙이다. 유전자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솝의 우화에 보면 바닷가에 기어 다니는 게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게들이 앞으로 걸어가는가? 옆으로 걸어가는가? 옆으로 걸어간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다 모아놓고 얘들아, 오늘부터 앞으로 똑바로 걷자. 다른 애들은 다 앞으로 가는데  왜 우리는 옆으로 가냐?  애들도 그래요, 아빠, 이제 우리 앞으로 걸어요. 그래서 아빠가 차렷, 앞으로 가! 그런데  앞으로 가지 않는다. 계속해서 옆으로 간다. 왜 그런가?  유전자가 그렇다. 게의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는 법이 옆으로 걷도록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무엇이 법이었는가?

안 주고는 못 견디는 사랑의 법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사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가 타락한 후에도 우리 부모들에게, 다 그 법을 넣어 주셨다. 

그래서 자식 그러면 꼼짝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법이다. 우리 속에 있다(누가복음 11:13).

우리 본성이 타락되어 비록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사랑의 법이 움직여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해야 되겠다 해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랑’이라는 말은  다 주는 본능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잊어버리면 안 된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때 그 양심에, 그 마음에 율법 곧 본능적인 사랑,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랑, 예수님의 생애로 보여주신 그 사랑의 법을 기록하셨고, 그렇게 살았는데 죄를 선택한 이후로는 부모-자식간의 사랑 이외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 말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 타락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3. 절대 자유의지 - 계시록 3:20

세 번째,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에 대한 인간 자녀의 절대적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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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만 이것을 주셨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선택하는 대로 살 수 있다. 얼마든지....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너는 이렇게만 살아야 한다'라고 창조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어떨 때는 이런 어리석은 기도를 할 때가 있다. '하나님 내가 너무 못되고 너무 악하고 너무 이기적 이어서 도저히 저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없애 주시고 그냥 착하게만, 사랑만 되어 지도록 아주 기계처럼 되어 지게 그렇게 만들어 주십시오. 저는 제 의지로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안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가 있다.

그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동물이나 기계이지 인간이 아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들딸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완전한 자유를 가지신 분이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요한계시록 3장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 하신다.

사람은 마음문에 문고리가 안쪽에 있다. 그래서 아무도 못 들어간다. 본인이 열어주어야 열린다. 절대적인 자유이다.

한마디로 이 말씀을 요약해 보겠다. 여러분의 자유의지라는 손이 자기의 소위 신앙본능의 코드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가슴이라는 콘센트에 꽂는다. 그것은 자기 자유이다.  꽂을 수 도 있고 꽂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자유 의지라는 인간의 손이 신앙이라는 본능을 아버지의 사랑의 가슴의 콘센트에 꽂는다.  그러면 아버지 가슴에서 뭐가 나올까? 사랑이라는 전기가 나온다. 이것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 무한하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라는 전기가 들어 와서 내 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본성의 기계를 움직인다. 방앗간에 가면 기계들을 콘센트에 꽂으면 어떻게 되는가? 왱왱 하고 돌아가지 않는가? 그래서 떡이 척척척 만들어 지지 않는가?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전기를 받으면 사랑이라는 제품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 사랑을 자기 마음껏 나누고 사는 자유로운 존재로 우리를 창조 하셨다. 그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신다. 그렇게 생기셨다. 그 형상, 그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의지의 코드를 사단에게 꽂았더니 모든 하나님의 형상이 모두 파괴 되었다.

창세기 2:17그것이 소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셨던 말이다.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그날  죽지 않았다. 900년 넘게 살았다. 하나님께서 그날 "죽으리라" 하셨는데 그날 죽은 것이 무엇일까?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다 타 버렸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사랑만 할 줄 알던 인간이 타락 후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죄만 행하게 되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해 놓으신 절대 자유의지를 이제 다시 하나님께 맡겨서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해서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의 가슴의 콘센트에 꽂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서 본능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자식에게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주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조건 없이 헌신, 희생하는 그 사랑이 그 사람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그것이 거듭난 상태이고 구원 받은 상태이다. 

타락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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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44창세기 2:17
범죄 한 후에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서 본래 인간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유전자가 죽게 되고 사탄의 유전자로 다시 태어났다. 이타적 사랑의 유전자에서 자기사랑의 유전자로 바뀌었다.

다만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본능적인 유전자는 남아 있어서, 타락한 인간 자녀가 하나님의 본능적인 사랑을 더듬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 누가복음 11:13, 말라기 4:5,6

거듭난 후

요한복음 3:3,5,14,15
죄인인 우리 인간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에배소서 2:1
우리 죄인은 육신의 숨은 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본능적인 사랑의 유전자는 죽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유전자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이제 그 사탄의 유전자는 죽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본능적인 사랑의 유전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즉 재창조함을 받아야 한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 값을 치루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은혜로 예수님만이 다시 우리 죄인을 낳아 주실 수 있다. 즉 재창조하여 주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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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유전자가 죽고 전적인 이타적 사랑의 유전자로 다시 태어나는 변화를 말한다. 곧 자기 자식에게 조건 없이 주고, 조건 없이 헌신하고, 조건 없이 희생하는 그 사랑이 하나님께 거듭난 의지를 드리기만 하면 조건 없이,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되어지는 상태가 거듭난 상태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상태이고, 성령이 내재하는 상태이고,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상태이다.

성경구절

  • 창세기 1장 26절
  • 전도서 3장 19절
  • 시편 42편 1절
  • 갈라디아서 5장 6절
  • 마태복음 6장 6절
  • 시편 139편 1~5절
  • 마태복음 6장 8절
  • 요한계시록 3장 17절
  • 로마서 2장 14,15절
  • 베드로후서 1장 4절
  • 로마서 2장 14절
  • 마태복음 22장 37~40절
  • 요한계시록 3장 20절
  • 로마서 5장 12절
  • 요한복음 8장 44절
  • 창세기 2장 17절
  • 요한복음 3장 3,5,14,15절
  • 에베소서 2장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