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의 의미

by blog posted Nov 0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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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오는 거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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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같은 상태이다.

'거듭남'은 생물학적 표현이고 '의'는 법적인 표현으로 율법이 지켜지는 상태로서 자동적으로 열매가 맺혀진 상태를 말한다.

'거듭난다'라는 것은 생물학적 표현이라고 했는데 이 의미는 우리가 예수 믿고 착해지고 선해지는 그런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생물학적인 완전한 변화를 뜻한다. '거듭난다'는 말의 '거듭'이란 부분의 본래 의미는 헬라어로 '아노덴'이라 하며 '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요한복음 8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났다'는 표현은 실제로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태어나셔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땅에서 나셨는데 위에서 나셨다고 하신 말씀은, 출생지가 하늘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으로 즉, 타락한 우리 죄인들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본성으로 났다'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1장 18절을 찾아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와 같은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취하신 것은 육체적 연약함과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퇴화된 상태. 그렇게 우리와 똑같은 상태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본성'은 하나님 자신의 '본능적 사랑의 본성'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신비 그 자체이다.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신비 중의 신비이다. 성경에서 말한 대로 경건의 비밀인 것이다. 

사랑의 본성으로 오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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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하는 말을 주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죄악의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와 같이 되셨다'라는 말은 인간의 타락한 결과로 생긴 퇴화와 연약함을 가지고 오셨다는 뜻이다. 아담의 큰 키처럼 큰 키로 태어나지 않으셨다. 죄로 말미암아 아주 줄어든 연약해지고 퇴화된 육체를 가지고 오셨다. 우리와 똑같으시다. 그분의 지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분 속에 있는 본성은 성령의 본성, 하나님의 참을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본능적 사랑의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 타락 후의 우리 인간은 본능적 이기심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 종자가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그것은 성령께 자기를 맡겨서 하나님 되심을 버리고 인간으로 만들어 주시라고 맡기신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분의 본성과 속성 자체가 하나님의 참을 수 없으신 사랑의 본성 그대로 나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생각의 구조는 우리 죄된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 차원과 질 자체가 다르다. 밤이나 낮이나 자나 깨나 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죄인 대신 죽어서 저 불쌍한 내 자식들을 구원할 것인가' 오직 그런 일념으로 사셨다. 

그러나 우리 죄인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우리 죄인들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많이 가지고, 내가 편안하게 되고, 내가 존경을 받고, 내가 높임을 받을 것인가' 늘 이런 것들뿐이다. 가는 방향이 예수님과 완전히 반대이며 그 구조 자체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본성까지도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쪽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음욕이나 탐욕 등 죄의 욕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만약에 그런 죄된 욕심을 품고 계셨다면 그분은 죄인이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거듭나야 하는가?

이미 김씨 집안에 태어났는데 박씨 집안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는 분명히 아니다. 무엇이 거듭나야 하는가 하면, 쉬운 말로, 우리 마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어떻게 거듭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새로 태어난다는 것일까? 요한복음 3장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과정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과정 속에서 종자가 바뀐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속에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은 본능적 사랑의 본성이 없이 그냥 보통 말하는 사랑이 있다. 조금 나눠주고, 내 것 쓰고 남은 것 주고, 단지 그런 정도의 사랑의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씨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르다. 거듭난다는 것은 종자(유전자)가 바뀐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가 창조될 때 우리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유전자, 그 씨가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유전자가 죽었는데도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하나님의 유전자가 죽고 마귀의 유전자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대로 이 마귀의 유전자가 죽고 하나님의 유전자로, 하나님의 씨로 다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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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직접 말씀하신 '거듭남'(요 3:3)이라는 단어의 원어의 뜻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요 3:5)이다.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난다(요 3:6). 즉, 창조 시에 받은 하나님의 형상, 이타적 사랑의 본성, 본능적인 사랑의 본성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거듭난다'라는 표현은 ‘본래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셨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다, 새롭게 창조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사람이 노력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셔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현재 내 속에 있는 철두철미하게 나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심이라는 이 죄의 본성이 반드시 죽어야 된다. 어떻게 죽고 어떻게 거듭나는지에 관해서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1장부터 10장까지 계속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 "거듭남"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거짓 가르침들은 '착하게 살라' '사랑하라'며 잠깐 감동 주고 눈물 몇 방울 흐르게 할 뿐이다. 자신은 경험해 보지도 않은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되지도 않는 것을 가르친다. 사람들에게 하라고만 할 뿐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전혀 가르치지 못한다. 이런 복음이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잠깐 감동까지는 받게 하는데 다시 거듭나게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감동이 없는 세상에 조금 감동을 주면 사람들은 감동 조금 받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정말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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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그 본능적 사랑의 본성으로 다시 창조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그것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들어가는 절대적 조건이다.  

감동이나 감정, 이것들은 결코 거듭난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식인 우리들을 사랑하신 그 본능적 사랑이 우리 안에 다시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거듭났다 하고 싶어도 절대로 거듭난 것이 아니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8장 23절
  • 마태복음 1장 18절
  • 요한복음 3장 5절
  • 요한복음 3장 3절
  • 요한복음 3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