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성훈련의 요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훈련
영성훈련은 일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종들이 꾸준히 연마하던 훈련법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우리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종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엘리야도 광야에서 수년을, 세례(침례) 요한 역시 장성할 때까지 30년을,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사도 바울 역시 아라비아에서 2년 반 동안을 영성훈련에 바쳤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은 모두 영성훈련이라는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교회가 하늘 가나안을 통과하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 바로 광야입니다(요한계시록 12장 6절, 14절). 세상에 있는 번쩍번쩍한 사물은 하나도 없는 곳,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있는 곳, 어느 가스펠송 가사처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성소와 언약, 불기둥과 구름기둥, 반석의 생수와 만나, 장대에 매달린 불뱀 등 우리는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이 곳은 예수님 자신입니다(고린도전서 10장 3〜4).
2. 영성훈련의 내용
영성훈련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연구훈련(요한복음 5장 39절): 목적은 예수님을 찾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명상훈련(시편 119편 97절): 되새김훈련
기도훈련(사무엘상 3장 10절): 듣고 복종하는 훈련, 주님과의 사랑의 대화훈련
예수님의 40일 기도와 침묵훈련(시편 46편 10절)
3. 영성훈련의 목적과 상세
예수님을 만나고 죄의 용서를 받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창조 받는 영성훈련은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져 있고, 우리의 심령은 죄로 인하여 마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일정기간 오직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하고 예수님과만 교제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에서 영성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이와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성훈련은 영성을 형성하는 훈련뿐만 아니라 훈련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훈련입니다. 단순히 영성을 개발하는 것만이 아니고 형성하는 것 전체를 훈련의 과정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가. 말씀연구훈련
영성훈련은 무엇보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씀은 나침반과 같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훈련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말씀을 언제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A. 연구 주제
1) 이사야 53장, 시편 51편-메시야 에언: 고난 받는 종,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에 오셔서 거절당하시고 고통당하실 것을 예언한 부분.
2) 예수님의 생애, 특히 마지막 부분의 생애
3)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훈련
B. 연구 방법
성경을 한절씩(verse by verse)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자는 성경의 한 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속에 어떤 사상과 의미를 넣어두셨는지 확실히 알기 위하여 모든 생각을 집중하여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여러모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알게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본문 속의 의미가 분명해질 때까지 한 절씩 연구해 가는 것은 일정한 목적이나 적극적으로 어떤 교훈을 얻으려는 생각도 없이 다만 여러 장의 성경을 통독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나. 명상훈련
두 번째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흔히 ‘명상(meditation)’이라고도 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되새김질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훈련의 내용입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은 위가 보통 네 개가 있다고 합니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서 음식을 먹은 다음, 다시 내어가지고 다시 씹어서 두 번째 위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 동물들은 무조건 먹고 소화시키는 게 아니라 먹은 것을 다시 꺼내서 씹고 그 풀 속에 있는 영양소를 다 흡수하고 섭취하는 행위를 반복합니다.
다. 기도훈련
세 번째가 기도훈련입니다. 기도훈련은 사무엘상 3장 10절에 사무엘이 했던 것처럼,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을 달라는 요청이지 본인의 말을 들어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들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가 ‘독백(monologue)’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혼자 이야기하고 떠드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대화(dialogue)’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자기 말만 늘어놓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큼 짜증나고 지루한 대화도 없습니다. “이걸 들어 주십시오.” “저걸 들어 주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의 첫 번째 기도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장 9절) 이에 인간은 다음과 같이 처음으로 응답합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 이것이 첫 번째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무엇을 달라하는 청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대답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7〜10절) 시편 139편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너무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입니다. 우리의 앞뒤를 두르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결국 우리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말씀해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아주 모범적인 사례가 등장합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의 얼개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2〜4절) 정말로 주기도문은 장엄한 기도문입니다. 영성훈련할 때마다 주기도문을 자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줄줄이 외우지 말고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라. 예수님의 40일 기도와 침묵훈련
예수님의 40일 기도에 대하여 연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말씀을 펴시고 기도하시고 명상하셨습니다. 하루의 모든 양식을 기도에서 얻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40일 기도에 임하실 때에 먼저 준비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금식(fasting)’입니다. 40일 기도에 들어가셨을 때, 주님께서는 음식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금식을 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금식에 부담을 갖습니다. “꼭 금식을 해야 하는 겁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금식은 절대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자연스레 밥이 먹히지 않아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금식기도에 관한 좋은 말씀이 이사야 58장에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6〜7절)
예수님께서 하신 금식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고통당하는 죄인들을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보통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고민되는 일, 어려운 일이 신변에 생기면 금식하고 싶지 않아도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금식은 굶주리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밥을 드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금식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40일 기도에 들어가실 때에 말의 금식, 곧 사람하고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광야로 갔을까요? 오로지 하나님과만 말씀하시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어느 종교의 영성훈련도 다 침묵이 기본입니다.
세상은 온갖 잡음과 소음, 고함과 발언들로 넘쳐납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서는 세상의 습관이나 행습에 일치하지 아니하는 생애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각기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마음에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모든 다른 소리가 침묵되고 조용한 가운데 그분 앞에서 기다릴 때 영혼의 침묵이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분명히 들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편 10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예수만 보이더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성훈련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목사님들이 앞에 나와서 설교하면 뭘 많이 깨닫고 아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이 하는 말을 깨닫고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정보를 얻는 정도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식을 얻을 뿐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설교가 넘쳐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죄가 없어져야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심령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자기를 보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본 모습, 쉽게 말하면 자기 속에 죄 밖에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사람을 복 있다고 그랬습니다. 자기 본 모습, 그것은 설명을 해 주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죄를 벗겨내면 나중에는 알맹이, 자기 몸만 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누드 상태가 자기 모습인 것입니다. 죄를 벗겨내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를 볼 수 없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만 보이더라. 이 ‘만’자가 왜 붙었는지 여러분 보셔야 됩니다. 왜 그럴까요? 아픈 사람은 뭐만 보이는가요? 의사만 또 병원만 약국만 보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만 보입니다.
‘예수만 보이더라‘는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만 보이는 사람은 죄인인 사람입니다. 죄인만이 예수님만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인 외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아닌 사람은 성경에 대한 지식들과 세상에 많은 정보들, 그런 것들이 보입니다. 또 그런 것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만 보이는 것은 ‘나 같이 불쌍한 죄인이 없다.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용서해 줄 것인가? 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만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정보, 예수님에 대한 지식만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신약성경 헬라어로 ‘예수스‘, 구약성경은 ‘예수와‘ 즉 ‘구원자‘입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자입니다. 죄인 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예수님을 보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이 예수님과 나 사이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비참한, 그야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참한 내 모습의 죄인이 아닌 이상 절대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침묵을 하는 이유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교제만을 위해서입니다. 이 예수님과의 허니문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과 죄인 사이에 허니문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이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죄인과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쏟아서, 자기 목숨을 다 바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내 아내를, 내 남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어떤 욕심을 채우기를 원하고, 밥 잘해주고, 나한테 따뜻하게 해 주길 원합니다. 그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아내를 그냥 다 뺏어서 아내를 다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이 돈 많이 벌어주고, 잘해 주고, 선물 사 주는 그런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욕심 차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을까요? 내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을 통해서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고 정말 내가 죄인으로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우리가 침묵하고 기도하는 목적입니다.
계속 그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가슴 속에 깊이, 바다 속에 내려가듯이 내려가는 경험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 맛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그럽니다. 피아노 치는 사람들, 바이올린 하는 사람들이 하루 10시간씩 연습합니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그렇게 쉽게 연주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똑같이 얘기하는 것은 하루만 쉬어도 하다못해 10시간 하는 것 오늘 바빠서 3시간만 하면 당장 손놀림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깊이 숙지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