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는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디서 만나시는지 살펴보았다. 분명히 출애굽기 29장 42, 43절에서 성소의 입구의 번제물위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대제사장을 통해서 우리 죄를 완전히 말소하시는, 속죄소 위에서 우리를 마지막으로 만나시는데 그 속죄소가 로마서 3장 25절에 보면 바로 예수님이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희생이 근본이 되어서, 기초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거기 앉으셔서 그 속죄소, 곧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위에 앉으셔서 우리 죄를 지우신다. 놀라운 복음의 이야기이다. 이제 우리가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번제, 이 ‘번제’에 대해서 오늘은 생각해본다.
‘번제’라는 말은 ‘올라’라는 히브리말인데 우리말과 같다고 말씀 드린바있다. ‘위로 올라간다’ 혹은 ‘whole offering’ 전체를 다 드린다 해서 ‘전제’라고 한다. 전체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통째로 다 불살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에 자신을 남김없이 제물로 바치셨던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을 나타냈다.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전체를 다 하나님께 드렸다. 실제로는 우리 죄로 우리가 그렇게 없어져야 된다. 우리가 통째로 다 없어져야 될 인간들이다. 그런데 우리 죄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열납’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열납’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신다’ 그리고 창세기 4장4절의 말씀은 ‘샤아’(열납하다)라는 말을 헬라 사람들은 그것을 ‘불을 내린다’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 보신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 보시면 불이 내린다. 불이 내리면 죄인과 함께 죄가 사루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열납의 조건
열납의 조건이 있다. 어떻게 열납되는가? 레위기서 1장 3절에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여기 ‘열납하시도록’이라는 히브리말을 영어로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에는 ‘기꺼이’라고 번역했다. ‘기꺼이’, 그리고 나서 4절에 “다시 그가 번제물에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안수의 조건이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기꺼이’ 드리는 예물이다. 두 번째는, 1장 4절 ‘안수하여’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열납하시는가? 열납의 조건이 무엇인가?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기꺼이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어린양이신, 우리의 죄를 지신 예수님의 이마 위에 우리가 우리 죄를 기꺼이, 그분의 머리 위에 우리 죄를 나타낸 가시관을 기꺼이 씌워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정말 버리고 싶어서, 죄가 너무너무 지긋지긋해서, 이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우리 죄를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꺼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기꺼이 죄를 택했다. 이사야서 1장 13, 14절의 말씀대로 그들은 죄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성회와 아울러 제사 드리면서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죄를 내놓지 않는 것이다. 안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기꺼이 내어 놓음
이 ‘기꺼이’라는 말, 참 번역이 잘 되어있다. 이 ‘기꺼이’ 죄를 예수님께 옮겨 드리는 것은 죄의 흉악성을 알고 동시에 그 죄가 예수님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괴롭히고 죽였다는 사실을 알 때에 비로소 죄를 ‘기꺼이’ 내놓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아들의 처참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사람만이 ‘기꺼이’ 죄를 내어 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기꺼이’ 내놓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용서의 사랑이 죄를 내놓게 한다.
옛날에 그 어느 동네에 보면 체 내리는 집이 따로 있다. 고기를 먹고 체했다. 그러면 그 체 내리는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이렇게 배를 열심히 만지고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어떻게 하면 토한다. 그러면 진짜 그 고기가 나온다. 고기를 토해 내도록 만든다. 죄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밖으로 내놓아야만 견디게 만드는 은혜이다.
요즘 같으면 소화제를 먹으면 소화가 되어서 없어지든지 아니면 밑으로 쏟고 토하고, 어떤 다른 물질이 소화시키거나 토하게 만드는, 쏟는 물질이 들어가면 그 물질이 그 체한 것을 토해 내게 하거나 쏟아내게 한다.
기도의 응답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에서 하셨다. 이웃집에 사는 친구가 밤이 늦어서 자고 있는데 자기 집에 또 다른 아주 절친한 친구가 왔다. 그런데 먼 길 오느라고 밥을 못 먹었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자기 옆집에 있는 친구에게 문을 두드린다. 여보게, 여보게 늦었네, 미안하네. 지금 밤 1시이지만 어떻게 방법이 없네. 우리 친구가 배가 너무 고파서 힘들어 하니 좀 빵을 빌려줄 수 있겠나? 그러니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누가복음 11장 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 할지라도” 친구 정도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얼마나 간절히, 마치 자기가 죽을 것처럼, 나 지금 배고파 죽겠네. 나 좀 살려주게! 하고 정말 간절히 자기 친구를 위해서 달라고 요구를 했을 때, 기도했을 때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간절함만큼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기도의 응답에 첫 번째 조건이다. 강청이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늘 말씀드리지만 기도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 기도는 강함에 비례한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느냐, 정말로 간절히,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주셔도 그만, 안주셔도 그만하는, 그런 기도는 응답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 8절을 마치시면서 9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 10절에 ‘구하는 이마다 반드시 다 받는다’. 그런데 여기 구하는 이가 어떻게 구하는가? 강청함으로 구하는 것이다. 정말 내가 죽을 것처럼, 내가 배가 고파서 죽을 만큼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친구여, 떡을 빌려 달라하면 그때 이 친구가 했던 말대로 내가 자네 친구이기 때문에 떡을 빌려주는 게 아니고, 자네가 그렇게 간절히 요청하니 빌려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안수이다. 반드시 자기 죄를 꺼내서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야한다. 내 죄를, 그 고통스런 죄를 씌워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이상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가실수가 없다. 늘 말씀드리지만 안 된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내가 일부러 그런 말씀을 드린다. 안 된다, 나는 죄를 버릴 수가 없다. 그러면 그 순간만이라도 버려 보시라고, 그리고 죄가 버려지지 않는, 회개가 안 되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안되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을 드린다.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저 사람이 다시 미워질망정 오늘 이 저녁에 잘 때는 “하나님, 제가 미워하는 것이 분명히 죄인 줄 압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일 아침 일어나서 그 사람을 바라보고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서 너무 참담하고 그러면 또 다시 기도하는 것이다. 안수이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실 것이다. 그래서 성소에서는 반드시 간절함으로, 자기 죄를 진심으로 성소의 양에게 옮기지 않는 한 속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거짓 믿음을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이 현혹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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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출애굽기 29장 42,43절
- 로마서 3장 25절
- 레위기서 1장 3,4절
- 창세기 4장 4절
- 레위기서 1장 3,4절
- 이사야 1장 13,14절
- 누가복음 11장 8,10절